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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인다는 건

여우와 만남

by 담서제미

이글거리는 태양이 땅 위에 내리 꽂혔다. 더위에 바람마저도 숨을 고르고 있는 듯,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불편한 오른손손가락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꿈인 지 현실인 지 경계가 흐릿했다. 그 순간, 어린 왕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꼬리가 붉은여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길들여지지 않았어"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들여지지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말이야"

어린 왕자 대신 내가 물었다.


여우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관계를 만드는 거야. 지금의 너는 나에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넌 나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될 거야."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는 것.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쳐 지나간다. 어떤 사람은 눈길 한 번에 저며 들고, 어떤 이는 오랜 세월 함께 있어도 여전히 낯설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여우가 말한 것처럼 길들여짐에 차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만큼 길들여져 있느냐에 따라 마음의 강도가 달라진다.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여우가 말했다.

"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와 줘야 해. 그래야 내 마음이 널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어."


사는 동안 때때로 나만 봤다. 상대의 리듬을 배려하지 않았던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내 위주로 재단하고 기대하며 실망하기를 반복하던 숱한 날들이 있었다. 그 사람의 시간을 존중하기보다는 내가 우선이었다.


길들인다는 것은 내 시간을 기준으로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의 시간표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무수히 깨지고 부딪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시간을 서로 존중할 때 익숙해진다는 것을.


때로는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이 두려워 멀리하기도 했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 사람 없이 살 수 없으면 어떻게 되나 그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길들여지기 전에 이별을 먼저 생각했고, 그 후에 찾아올 상실의 아픔이 두려워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길들인다는 것은 상실의 두려움과 아픔까지 함께 껴안는 용기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아픔을 알기에 처음부터 길들이는 걸 두려워하기도 한다.


여우는 웃으며 말했다.

"비록 상실의 아픔이 클지라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고 싶어.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기다릴 대상이 있다는 건 매 순간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고, 비실 비실 웃음이 나오는, 하루를 더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익숙함이 두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 익숙함은 우리에게 무한한 의미와 위로를 준다.


처음에는 같은 시간에 찾아가고, 멀리서 인사만 하다 그다음 날은 조금 더 가까이 그렇게 두 존재는 서로에게 천천히 길들여진다. 서로 침묵을 나누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삶이라는 여정을 함께 호흡한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다려 본 사람만이 관계의 무게를 안다. 사람은 길들여진 만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한 만큼 상실이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삶이 우리에게 준 따뜻한 기회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순간, 너와 나는 온 우주가 되고 세계가 된다. 어쩌면 이별은 길들여짐에 따르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너와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는.(목요일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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