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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속에 펼쳐진 지도 같은

다운트북스, 그곳에도 그가 있었다.

by 담서제미

여행에는 각자의 목적이 있다. 어떤 이는 풍경을 보러 떠나고, 어떤 이는 새로운 음식을 맛보기 위해 길을 나서고, 어떤 이는 길 위에 길을 위해 나선다.


내 여행은 언제나 책과 연결되어 있다. 책은 나침반이자 가장 오래된 벗이며 내 삶을 이끄는 또 하나의 길이다. 어딜 가든 나는 그 도시의 서점을 간다. 그 도시를 조용히 지탱해 온 서점. 서점은 한 도시의 문화와 역사, 그곳 사람들의 삶을 가장 깊고 은밀하게 간직한 공간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유명한 관광지보다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서점에서 만난 책과 그 책이 건넨 사유였다.


런던과 파리를 여행하며 역사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세 곳의 서점을 만났다. 런던의 다운트 북스, 노팅힐 서점과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흐르는 시간과 이야기는 하나였다.


"책은 또 하나의 여행이며, 또 하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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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일어나 서점에서 샀던 에코백과 책을 거실에 늘어놓았다. 에코백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빨아서 볕이 잘 든 베란다 건조대에 널어놓았다. 그것을 거실로 가져와 그곳에서 샀던 책과 함께 짝을 맞춰 사진을 찍었다.


지금부터 여행길에서 내가 만난 그곳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안에는 나의 어린 왕자가 있었다.


<햇살 속에 펼쳐진 지도 같은 다운트 북스>


런던 메릴번 골목을 걷다 보면, 초록빛 서가와 고풍스러운 목조 계단으로 가득한 다운트 북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변덕이 심한 런던 날씨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잉크와 종이가 오랜 시간 빚어낸 은은한 향이 공간 속에 배어 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오크나무 바닥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서가가 깊은 숲길처럼 감싼다.


1912년에 문을 연 이곳은 여행자를 위한 서점답게 나라별로 책이 정리되어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아시아, 아프리카. 각 나라 이름이 새겨진 푯말이 서가 위에 달려 있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기분이 든다.


정면에서 고개를 들면 아치형 천창이 눈에 들어온다. 높이 솟은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책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아 활자 하나하나가 금빛을 입었다. 책들이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집, 한강작가의 흰 과 어린 왕자를 집어 들었다. 책을 손에 쥐고 서점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나무 의자와 세월의 흔적인 쌓여 있는 안락의자 앞에 섰다. 창가로 흘러드는 빛과 종이 냄새가 어우러진 이곳이야말로 책이 주는 가장 완벽한 안식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은 걸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마치 화음처럼. 그 소리는 수많은 여행자가 거쳐 간 발자취처럼 여겨졌다. 계단을 올라 그곳에서 바라본 서점의 풍경은 거대한 도서관 같은 장중함과 고요가 있었다. 그 속에는 작가들의 숨결과 영혼이 숨 쉬고 있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운트 북스는 그냥 서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 조각들을 한데 모아놓은 거대한 항해지도이자 나를 다른 대륙으로 데려가는 시간의 배였다. 책장이 곧 항로가 되고,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진정한 여행자가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왕자는 노팅힐 서점에서 사기로 하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집과 한강의 흰 번역본을 들고 근처에 있는 더 리첸트 공원 의자에 앉았다. 거기에 앉아 시집을 읽고 내 어린 왕자를 필사했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나는 너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거야."


머릿속에만 있었던 다운트북스는 이제 나에게 그냥 서점이 아니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에게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이어서 노팅힐과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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