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우리를 건너갈 때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by 담서제미

"비가 안 오면 가게요."


"아니, 날이 좀 더 선선해지면 가자. 너무 더워."


런던으로 떠나기 전 매주 화요일 떠났던 미플러스 포, 네 여자의 여행은 잠시 휴지기였다. 여행에 돌아와서도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 때문에, 우리는 날이 선선해지면 시작을 하되, 매주라는 것에 매이지 말자고 했다.


8월이 지나고 9월.

아침저녁으로 날이 선선해지자 슬슬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고 하네.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곳으로 다녀오게요."


"아침 10시 반에 둘째 언니 집에서 봅시다."


"그러자."


만나기로 한 날 아침, 하늘은 잉크로 쓴 오래된 편지같은 색이었다. 당연히 아직 비는 오지 않았다. 채비를 하고 주차장으로 나간 시간이 10시였다. 웬일이지. 항상 먼저 와 있는데. 다시 약속시간을 확인해 보니 10시 30분이었다. 다른 멤버들이 올 동안 걷기나 하자며 테니스코트장을 막 들어서는데, 큰언니가 나타났다.


"언니, 10시 30분인데 이리 빨리 오셨어요."


우리는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킨 적인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적게는 10분에서 많게는 30분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한다. 그것마저도 넷이 비슷하다. 이래서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화순쌍봉사. 산사의 공기는 축축한 흙냄새와 젖은 솔향이 섞여 자연 그대로의 향기를 뿜고 있었다. 산사 가득 울려 나오는 스님의 독경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막내를 따라 절을 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종교가 다 불교인 것은 아니다. 천주교와 불교가 섞여 있지만 타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곳에 가면 그곳 종교를 존중할 뿐이다.


먹빛 같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계단 위에 흐르는 빗물은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처럼 보였다. 비와 바람은 풍경소리에 화음을 넣었고 산새 소리는 한층 더 맑게 울려 퍼졌다. 경내를 채운 고요한 종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마치 세상 모든 소리를 바리톤으로 정리해 놓은 악보 같았다. 우리는 함께 합장하고 예불을 드렸다.


도라지청이 기관지와 목에 좋다는 말에 절 경내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도라지청을 샀다. 물엿으로 고아 만들었다는 도라지청의 갈색 액체는 마치 빗물에 씻긴 산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듯했다.


인근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후 찾은 한옥 카페는 여름과 가을이 손을 맞잡고 있는 문턱 같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백향과와 허브가 우리 앞에 있었다. 각기 다른 그 빛깔이 마치 우리의 시간처럼 여겨졌다. 여름은 이제 우리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가을은 조금씩 들어와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빗소리는 건물의 처마 끝에서, 나무 바닥을 타고, 우리 마음 안으로까지 내려왔다.


고즈넉한 정원에는 파릇파릇한 풀냄새와 흙냄새가 가득하고 잎사귀마다 맺힌 물방울이 유리알처럼 반짝였다.눈을 감은 채 들숨을 들이마시자, 흙과 빗물에 섞인 풀향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숨을 내쉬면서 지난 계절의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계절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우리를 건너가게 하는 중이라는 것을.


우리가 매번 여행을 떠나는 건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고, 나를 닮은 타인을 마주하며, 내 안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계획이 거창한 것도, 일정이 빠듯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여유 속에서 오히려 충만함이 생겼다. 한옥 카페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지금 이 순간이 곧 여행의 목적’이라며 속삭였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짧은 한때였지만 이 순간은 오래도록 남아 우리의 마음을 적실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장소가 아니라, 함께 걷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풍경이다. 우리는 그 마음의 풍경을 품은 채, 이 계절을 살아낼 것이다.


촉촉한 공기 속에서 커피 향이 퍼지고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타닥타닥, 후드득 소리가 배경음악이 된 오후.


창밖 풍경은 수묵화처럼 번져나가고, 네 여자의 이야기는 잔잔하게 피어났다. 잠시 멈춰 선 세상 속에서 우리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깨달음 한 줄>

“계절이 우리를 건너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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