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자 일상이 되어버린 인연
길을 나섰다. 꽃무릇을 찾아 떠나는 길. 그 길은 25년 전 내 출근길이기도 했다. 출근과 퇴근이 아닌,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계절을 만나러 가는 길. 발걸음마다 가을 햇살이 살이 오른 벼이삭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미플러스포, 네 여자가 완전체로 모였다. 서로를 향해 환한 꽃처럼 웃어주는 사람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눈빛과 손길. 부족해도 괜찮다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며 다독여주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우리의 삶이 되었다. 그런 인연이 있다는 건 축복 중의 축복이다.
차 안에서 가을 이야기가 피어났다. 화분 정리한 이야기, 지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 자녀들 이야기, 요즘의 소소한 하루들. 웃음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이미 여행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했다.
영광으로 향하는 밀재.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 길은 내가 25년 전 매일 지나던 출근길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시절과 겹쳐지며, 먼 기억 속의 내가 문득 손을 흔드는 듯했다. 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바람에 눕고, 길가의 감나무는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
불갑사에 도착하니 붉은 물결이 우리를 감쌌다. 언덕마다, 길가마다 꽃무릇이 수놓아져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 가을이, 실처럼 이어진 붉은 길이 우리를 극락의 문턱으로 안내하는 것만 같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숨이 절로 깊어졌다.
“꽃무릇이 염색재료로 쓰였대.” 셋째의 한마디가 여행의 색을 더 진하게 물들였다. 그 말이 신기해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알뿌리에서 추출한 색소가 진한 붉은색과 갈색 계열의 색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옷과 한지, 비단, 솜까지 자연의 물감으로 물들였던 사람들. 그 옛날을 상상하니 꽃무릇이 더 이상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꽃무릇은 잎이 있을 때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다. 서로 만나지 못하는 꽃, 하나가 스러져야 다른 모습이 드러나는 꽃. 그래서인지 사찰이나 길가, 묘역 주변에 많이 심겨 있었다. 윤회와 무상, 생사이별의 상징으로, 극락으로 가는 길목에, 혹은 극락의 경계를 나타내는 길에 붉은 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날 불갑사의 붉은 언덕에서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붉은 꽃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우리 얼굴에 고요히 닿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는 웃었다. 긴 세월의 무게가 그 웃음 속에 스며 있었다.
돌아오는 길, 가을바람이 차창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우정도 꽃무릇 같다. 때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계절이 오면 이렇게 다시 붉게 피어나 서로의 길을 밝혀준다.'
조용히 깨달음 한 줄을 남겼다.
“인연이란, 시간이 물러서도 다시 피어나는 계절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