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꽃이 되어 웃었다.

구절초와 아스타 , 가을꽃이 출렁이는 길 위에서

by 담서제미

"멀리 가야 되니 일찍 만나게요."


"몇 시에."


"새벽 6시 30분이요."


행여나 약속시간에 늦을까 봐 선잠을 잤다.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전 2시 20분, 오전 3시, 그렇게 오전 5시 30분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오늘 미플러스 네 여자의 목적지는 거창 감악산이다. 보랏빛과 하얀색의 향연 속으로 길을 떠나는 네 여자의 얼굴에는 꽃보다 더 환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번잡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성향 탓에 우리의 여행은 사람이 없는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오붓이 즐기다 사람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빠져나오는 것이다.


거창감악산까지 가는 길에는 안개가 얇은 이불처럼 감싸고 있었다. 우하니 밀려와 도로와 산과 논, 나무를 덮고 있는 안개는 우리가 감악산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개었다.


감악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첫 발을 내디뎠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풍경이 아니라 경이였다. 그것은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 삶의 정수를 묵묵히 보여주는 가을의 철학이었다. 낮게 드리운 산 안개가 걷히자, 세상의 시름을 모두 잊게 할 듯 보랏빛 아스타와 눈부신 하얀 구절초가 산비탈을 따라 용솟음치듯 피어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섬세한 붓으로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련했으나, 가까이 다가서자 꽃잎 하나하나가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별들처럼 반짝이며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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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아스타는 짙고 그윽한 깊이를 품고 있었다. 꽃잎은 쉴 새 없이 부는 가을바람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리면서도 결코 쉽게 꺾이지 않았다.


그 역동적인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더욱 선명한 보랏빛을 품어내는 모습은, 마치 삶의 고비마다 휘청이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제자리를 찾아 일어나는 우리네 인생과 같았다.


군락을 이룬 아스타들이 바람을 타고 한꺼번에 출렁일 때면, 보랏빛 물결이 산자락을 덮치며 흘러내렸다. 그 환희로운 물결 속에 우리의 마음도 함께 출렁이는 듯했다.


그 옆에 단정하게 피어난 구절초는 아스타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순결한 빛을 지니고 있었다. 구절초의 작고 하얀 얼굴들은 마치 밤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고요히 길을 밝혔다.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지상에 내려와 순수한 기도를 올리는 듯했다.


꽃잎 끝에 맺힌 영롱한 이슬은 햇살을 받아 잔잔히 반짝였다. 그 사이를 걸을 때마다 그 속에서 스며 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가까이 다가가 숨을 고르니, 흙내음과 어우러진 꽃내음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오래 묵은 슬픔마저 씻어내듯 맑았다.


화려하지 않은 꽃 구절초는 이미 그 소박함으로도 우리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꽃은 말없이 속삭이는 듯했다. “작아도 괜찮아, 순수함으로 이미 충분하다”라고.


미플러스 네 여자가 함께 걷는 길 위에서, 우리는 꽃을 보며 마음을 나누었다. 오랜 세월 각자의 길을 걸어온 우리는 이제 매주 화요일, 함께 떠나는 여행을 통해 삶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치열한 일상 속에, 또 누군가는 새로운 배움과 퇴직 후의 길 위에서 각자의 짐을 지고 있지만, 적어도 이 꽃길 위에서만큼은 모두가 잠시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웠다.


꽃 앞에서 나눈 우리의 대화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좋으면 좋다, 이쁘면 이쁘다, 그저 감탄하고 그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나는 아스타를 보면서 생각했다. 꼭 인생 같다고. 바람에 흔들려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이렇게 네 여자의 여행길은 매 순간 감탄이자 깨달음의 길이다. 어떤 난관과 삶의 무게에도 다시 일어나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있는 힘,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증표이자, 앞으로도 살아낼 모습이었다.


구절초는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 말없이 옆에 있어 주지만, 함께 있을 때 더 환하게 서로를 비춰주는 존재 같은.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나눴고, 그 웃음 속에 수많은 시간 동안 함께해 준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감악산 기슭의 가을꽃은 단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철학을 가르치는 고요한 스승이었다. 꽃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빛나고, 그래서 더욱 귀하다. 주어진 순간을 다해 피어나고, 순간을 다해 흔들리며, 순간을 다해 사라진다.


그 짧은 운명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꽃의 모습은, 우리에게 묵묵히 깨달음을 주었다. 머무르려 애쓰지 말고, 흐름 속에서 기꺼이 피어나라는 것을.


언젠가는 꽃잎이 흩날리고, 줄기가 시들겠지만, 오늘 우리가 본 이 환한 빛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삶 또한 그러하리라.


우리는 꽃길 위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을 들이마셨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했다.


흔들려도 괜찮아, 바람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니.


작아도 괜찮아, 서로가 함께할 때 우리는 환하게 빛나잖아.


그 속삭임을 들으며, 우리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 따뜻한 힘을 얻었다. 감악산의 가을꽃 앞에서 네 여자는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꽃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듯이, 오늘을 있는 힘껏 피워내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그 깊은 깨달음은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깨달음 한 줄>


삶은 머무름이 아니라 흐름이기에, 지금 이 순간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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