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
그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낼은 날이 더우니 광산구에서 밥 먹고 카페 가시게요."
10시 40분에 작은 언니, 11시 10분 큰언니 집 도착 예정이라는 미플러스 포 총무의 카톡을 확인하고 만장일치로 찬성한 일정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상반기 여행을 마무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낮 기온이 36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편하게 반바지를 입고 갈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서도 최대한 편한 복장을 하고 있는데 나가면서까지 그러기는 싫었다. 무슨 색 원피스를 입을까? 옷 장 앞에서 망설이다 검은색을 꺼내 입었다. 챙 넓은 모자와 양산까지 챙겨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셋째와 넷째에게 내려갔다.
"이건 뭐야.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이쁘게 오면 어쩌자는 거야. 이쁘다, 정말 이뻐." 한바탕 수다가 이어지고 큰언니 네로 향했다. 주차장을 향해 걸어오는 언니를 본 순간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큰언니도 새로 산 원피스를 차려입고 온 것이다.
"우리 이대로 들어갈 수 없어요."
우리 계획이 급하게 변경이 된 것은 순전히 의상 때문이었다. 매주 화요일이면 의상 콘셉트를 정해 여행을 떠났던 네 여자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좀 더 예쁘게, 조금 더 특별하게 차려입자는.
치마와 원피스, 각자의 취향이 담긴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여행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식당에 도착해 서로의 모습을 본 순간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웃었다.
"이렇게 입고 밥만 먹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우린 그렇게 계획을 바꿨다.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계획에 없던 날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미플러스 포' 서로의 다름을 따뜻하게 보듬는 네 여자. 우리의 상반기 여행은 구례 무우루 능소화와 섬진강 대숲에서 마무리된 줄 알았다. 삶은 계획대로 흐르지 않지만, 진짜 아름다움은 계획 밖에 있었다.
계획에 없던 화순 만연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절은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더위를 머리에 이고 고요히 서 있었다. 그곳에 우리의 환호를 부르는 능소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예상을 빗나가게 한 것은 종무소 담장을 수놓은 능소화였다. 바람이 능소화의 주황빛 치맛자락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는 그곳.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은 자신이 이 계절의 주인임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여길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우린 이 아름다운 걸 모른 뻔했잖아."
우리가 담장 아래에 서자 꽃은 기다렸다는 듯 살랑거렸다. 능소화도 우리도 말없이 담을 타고 흘러내렸다. 햇살을 받은 주황빛 꽃잎이 바람에 휘날렸다. 손을 뻗어 꽃잎 끝에 살짝 댔다. 닿을 듯 말 듯. 능소화와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가 되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과 꽃잎이 서로에게 화답을 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름다움은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일 때 더 빛이 났다.
서로에게 예쁘게 웃고, 예쁘게 입고, 예쁘게 마주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은 단지 겉모습을 위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안과 밖이 모두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임을, 그 빛을 서로에게 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계절과 햇살과 바람이 모여 꽃으로 피어난 능소화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리를 맞이했다. 꽃도 우리도 그곳에서 바람이 불면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고 빛을 받으면 그 뜨거움을 같이 느끼고 있었다.
"능소화가 우릴 기다렸나 봐"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이 꽃이 이토록 눈부셨을까? 이 길이 이토록 특별했을까? 우리는 한낮의 더위로 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계획에 없던 그 길 끝에서 만연사 종무소 담장을 휘감고 있는 능소화를 만났다. 삶도 그랬다. 계획 없이 흘러들어온 순간들이 오히려 기억에 남았고, 불쑥 찾아온 인연이 계절을 환히 밝혔다.
우리 인연도 그랬다. 급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피어났다.
담장 아래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능소화와 치맛자락이 흩날리는 네 여인. 그 모습이 오래된 그림 같은.
우리는 '미플러스 포'. 이름처럼 아름다움도, 나이도, 삶도 다 더하기. 함께 있으면 더 좋아지고 더 빛나는 여자들.
우리는 그렇게 상반기 여행을 함께 했다. 달리듯 지나온 날들, 지친 삶에 위안이 되었던 시간들, 맘껏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 서로에게 거울이 되었던 그 모든 시간 위에 오늘이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 발걸음을 만연사 종무소 담장에 피어있는 능소화 앞으로 이끈 것은, 어쩌면 상반기 여행을 더 아름답게 마무리하라는 하나의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상반기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알았다. 흐드러진 것도, 피어나는 것도, 함께일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길을 나서며 담장을 뒤돌아보았다. 능소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계절을 통째로 품은 사람들처럼 조금 더 말랑말랑해졌다.
계획에 없던 하루, 그래서 마음에 더 남을 하루. 치마와 능소화와 우정이 만든, 우리만의 여름 풍경이었다.
이렇게 상반기 여행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다.
꽃이 계절에 따라 피듯이 우리는 인연을 따라 피어났다. 같은 방향으로 흩날리는 치맛자락처럼, 인연도 때를 만나 함께 흐르고 있었다.
계획한 것이 아니었기에 더 아름다웠다. 함께였기에 더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는 한 계절을 보내고 또 다른 계절 앞에 서 있다. 그 계절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익어가는 중이다.
<깨달음 한 줄>
가장 찬란한 날은 예고 없이 온다. 마음이 열릴 때, 그 하루는 인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