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하다는 편에 서기로 했다

그 식상함이 우리를 살게 한다

by 담서제미

"식상해. 이것도 저것도."


"나는 그게 너무 식상해서 싫어."


"그 작품도 너무 식상해."


식상해서 싫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럼 식상하지 않은 것은 뭔데."라고 물으면 그에 대해 "아, 그거구나"라고 속 시원히 답을 한 사람이 없다. 도대체 식상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뜻을 검색했다.


국어사전에는 식상이 명사로 같은 음식이나 사물이 되풀이되어 물리거나 질림이라 나와 있다.


그렇다면 식상하지 않다는 거는 무엇일까?


매번 다른 음식이 나와야 되고 사물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식상하지 않다는 건가?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도 국어사전에서 나온 의미로 보면 식상이다. 결국 해 아래 식상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식상하지 않다는 건 새로움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 해 두자.


그 감각이 있는 사람은 똑같은 밥상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을 찾아낸다. 식상하지 않다는 건 세상에 없던 걸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진짜로 식상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새것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것에서 여전히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어둠이 내려앉는다.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상처받고, 다시 사랑한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식상한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기도 한다. 그 평범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숨을 쉬고, 견디고 내일을 기다린다.


고전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모든 이야기는 이미 한 번쯤 누군가의 입을 거쳤다는 것을. 왕의 몰락, 권력의 유혹, 사랑과 배신, 시기와 질투, 권선징악은 시대와 언어만 다를 뿐,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비슷하다.
'오디세이아' 속 떠도는 영웅도, '홍길동전' 속의 정의로운 의적도, 결국은 같은 인간의 본성을 노래한다.


자기 계발서도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 “오늘을 살아라.”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문장만 다를 뿐 뜻은 같다.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문장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문장에 위로를 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은 글이 식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익숙한 말속에서 여전히 ‘자기 이야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다르지 않다.


수천 년 동안 화가들은 하늘과 사람과 꽃을 그렸다. 그림의 주제는 다르지 않지만, 그 붓끝에서 늘 새로운 감정이 피어난다. 모네의 수련, 반 고흐의 해바라기, 고흐가 그린 하늘은 누구나 본 하늘이지만 그가 느낀 하늘은 단 한 번뿐이었다.


예술의 새로움은 대상이 아니라 ‘시선’에 있다. 같은 하늘을 보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색을 발견하는 사람. 그가 진짜 식상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는 다 똑같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셀렘과 기대, 그 뒤에는 사소한 오해가 쌓이고 쌓여 갈등으로 치닫고 그 끝에는 이별. 그 속에 늘 등장하는 건 시기와 질투, 작은 권선징악이 있다. 착한 이가 상처받고, 이기적인 이가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믿고 사랑을 쓴다.


왜일까?
그 식상한 이야기 속에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식상하지 않은 이유는, 언제나 새 주인공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오늘의 나이기 때문이다.


식상함을 경계하는 사람은 새로움을 쫓지만, 진짜 새로움을 아는 사람은 식상함을 사랑한다. 반복되는 이야기, 되풀이되는 감정, 익숙한 문장 속에서도 매번 새로이 느껴지는 마음의 떨림이 있다면, 그건 이미 ‘새로운 세계’다.


고전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그 안의 이야기가 식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이 변하기 때문이다. 같은 구절을 다시 읽을 때, 어제의 나는 울었지만 오늘의 나는 웃는다. 그 차이가 바로 새로움이다.


식상함은 낡은 틀이 아니라, 새로움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가 반복 속에서 지루함 대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창조다.


그래서 나는 이제 식상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전의 문장을 다시 읽고,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에 또다시 눈물 흘리고, 비슷한 자기 계발서를 다시 펼쳐도 괜찮다.


그 모든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 하지만 다시 느끼는 내가 있다.


진짜 식상하지 않음은,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놀라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미플러스 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매번 같은 계절에 피고 지는 꽃 한 송이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고 매번 환호성을 지르는.


사랑해라는 그 식상하고 진부한 그 말 한마디에 너와 내가, 세상이 얼마나 단단히 연결되는가. 새로움은 설레지만, 오래됨은 믿음이 된다. 사랑이 오래가는 이유는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식상함이 관계를 단단하게 붙잡는다.


예술도, 삶도, 오래된 인연도 결국은 식상함의 다른 얼굴이다. 시인은 같은 언어로 다른 세계를 쓰고, 화가는 같은 색으로 또 다른 하늘을 그린다. 매번 만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편안함에 안도한다. 반복은 모방이 아니라 축적이다. 그 식상한 반복이 쌓여, 결국 나라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나는 이제 식상한 편에 서기로 했다.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는 지루하다지만 나는 그 지루함이 안온하다. 그 평범한 온도가 나를 살리고, 나를 사람답게 만든다.


식상하는 건, 이미 충분히 살아봤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봐도, 어떤 자극이 와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반복할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모든 식상한 예술작품이, 식상한 삶이, 식상한 인연이 나를 살린다. 햇살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비추고 바람은 같은 리듬으로 불어온다. 그 식상한 세상의 순환이 멈추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이다.


새로움이 삶을 잠깐 빛나게 한다면, 식상함은 삶을 지속하게 한다. 나는 이제 그 식상함 속에서 안심한다. 왜냐면, 그건 매일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 식상함이 나를 살게 한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깨달음 한 줄>

식상하지 않다는 건 세상에 없던 걸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식상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새것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것에서 여전히 놀라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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