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주름위로 흐르는

가장 고요한 동행

by 담서제미

바람 한 줄기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계절, 가을. 투명하고 애틋한 공기는 삶의 모든 장면을 왠지 모르게 아련하게 감싼다.


옅은 햇살이 스며드는 오후, "누나, 부모님 모시고 꽃구경 다녀오게요." 수영장에서 막 나오는데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길을 나섰다. 팔십 대 부모님과 육십 대 딸과 아들이 함께 길 위에 선 오후 한 때.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한 폭의 오래된 유화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정겨운 체크무늬 셔츠 위에 단정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어머니는 마치 처음 데이트를 나가는 소녀처럼 연한 분홍빛 셔츠를 곱게 차려입으셨다. 그 소박한 옷차림 속에 숨어 있는 두 분의 존재감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을 어딜 가시나 두 손을 꼭 잡고 걸으신다. 오랜 세월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견디며 여기까지 오신 그 삶,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몰아치나 어디든 함께하셨던 그 길. 거칠고 굵은 주름들, 검버섯의 흔적까지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진 두 분의 뒷모습은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맞잡은 두 손이야말로 두 분이 함께 통과해 온 인생의 터널을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었다. 그 견고하고 숭고한 모습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햇살이 두 분의 어깨 위에서 잔잔하게 부서졌다. 그 모습이 가을날의 축복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때마다, 두 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가 살짝 기울었다. 그 찰나의 흔들림 속에서도 두 분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정한 보폭으로 걷고 계셨다.


계단이 나타나자 아버지의 손이 어머니를 더 감쌌다. 어머니의 걸음이 힘에 부쳐 느려지면,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보폭을 맞추었다. 그 조용하고 섬세한 호흡. 그것은 수많은 말을 압도하는, 수십 년의 세월이 응축된 침묵의 대화였다.


사랑은 그렇게 오래된 사람들의 걸음 속에서, 젊은 날의 격정과는 다른, 느리게, 천천히, 뿌리 깊게 이어지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세상 모든 사랑의 끝은 결국 ‘함께 걷는 일’이 아닐까. 젊을 땐 사랑을 뜨거운 맹세나 말로 증명하려 애썼다.


중년에는 가족이라는 무게와 책임으로 버텼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랑은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진다. 그 옆에 있어 주는 존재의 무게가, 세월을 이겨내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힘이, 그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길가에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코스모스가 고개를 흔들고, 억새풀은 햇살 속에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 모든 가을 풍경이 두 분의 묵묵한 뒷모습을 찬란하게 축복하듯 감싸주었다.


젊은 날, 당신들의 삶을 온통 자식들에게 헌신했던 두 분이 이제 하늘을 올려다보고, 꽃을 보며 여유롭게, 가을 속을 걸어가고 있다. 그 걸음 속에는 삶의 덧없는 무게보다도 더 깊은 평온과 안식이 담겨 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소.” 서로에게 진심을 전하지 않아도, 수많은 계절을 통과하며 생긴 영혼의 주름처럼, 두 분은 서로에게 이미 빛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울컥했다. 나도 저렇게 손을 잡고 익어갈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나도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삶의 끝자락까지 걸음을 조율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인생이란 결국 누군가와 걸음 맞추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서 빨리 걷던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언젠가는 속도를 늦춰야 하고, 힘들어 뒤처지던 사람도 용기 내어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는 일, 함께 익어가는 삶. 어려운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삶의 본질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부모님의 굽은 등, 바람에 나부끼는 셔츠 자락, 그 사이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꼭 잡은 두 손. 그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직하며,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랑은 젊음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처럼 깊고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것임을 나는 삶의 진리처럼 되새겼다.


어쩌면 인생의 진짜 목적은, 큰 성공이나 명성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함께 걷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 무엇보다 눈부시고 소중한 선물처럼 가슴에 남았다.


나는 두 분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내 걸음에도 어느새 가을의 고요함과 깨달음이 스며들고 있었다. 삶의 끝에서조차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그 헌신적인 사랑,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유산이 아닐까.


<깨달음 한 줄>

사랑은 결국, 끝까지 서로의 걸음을 기억하고, 같은 속도로 함께 걸어주는 영원한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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