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기다려고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해남포레스트 수목원에서 미플러스 포의 하루

by 담서제미

엊그제까지만 해도 “덥다, 덥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베란다 창문을 여니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들어온다. 몸이 화들짝 놀라 움츠러든다.


'더위에 낑낑대던 시절이 있었나. 그런 시절이 정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름은 이미 물러나 있었다.


미플러스 포 네 여자가 길을 떠나는 날, 나는 옷장 앞에서 잠시 멈췄다. 얇은 블라우스 대신 두께감 있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머플러까지 둘렀다. 융이 들어간 겨울용 스타킹까지 신고 길을 나섰다. 가을이 아니라 겨울이 와 버린 것만 같은 날씨. 세월은 어느새 한 계절을 보내고 두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남 포레스트 수목원.

수국이 만발한 작년 늦봄에 왔었던 이곳에 다시 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수목원은 가을빛으로 천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단풍나무 대신 입구를 지나자 팜파스푸밀라가 우리를 반겼다. 햇살은 나무와 풀잎과 꽃잎 사이로 스며들어 잔잔하게 흘렀다. 바람은 나무 사이를 스치며 낮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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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지 않아서 좋았다.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스며드는 그 풍경이 이미 완벽했다. '가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는 말처럼 그렇게 가을은 우리 안에 있었다.


치열하게 살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안온함이 가을바람과 햇살 속에 들어 있다. 숨을 깊숙이 들이쉬고 내 쉬었다.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퍼져 나왔다. 그 향은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듯 맑고 차분했다.


바람이 불면 팜파스푸밀라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세상은 적막하리 만큼 고요했다. 그 속에 우리는 살아 있었다.


"여기로 와 봐요."

"여기 서 봐요."


막내의 말에 따라 우리는 사진 속 풍경이 되었다. 그것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또 하나의 기록이었다. 이처럼 소리 없이 단정하고 고요한 가을이 또 있을까. 그 고요 속에서 마음도 잠시 멈추었다. 여름이 떠난 자리에 자리 잡은 짧고도 강력한 가을. 이 계절을 즐길 시간도 그리 길지 않으리라. 계절은 짧고 순환은 영원하니 말이다.


'다닐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다니다.

볼 수 있을 때, 마음껏 바라보자.

숨 쉴 수 있을 때, 깊이 들이마시자.'


우리는 매번 이 말을 되새긴다. 마음이 맞은 사람들과 함께, 온 계절을 누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사라지기에 더 귀하다.


거창하지 않지만 제때 피어나고, 늘 제자리에 서 있는 삶. 한여름의 열정을 지나 이제는 스스로 속도를 아는 나이, 그것이 우리가 닿은 미플러스 포 네 여자의 얼굴이다.


그건 결국, ‘지금’을 사는 법이다. 지나간 계절을 놓아주고, 지금의 바람을 느끼는 것. 그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숲에서 또 한번 배운다.


세상에 "다음에 해요"라는 말이 언제나 약속처럼 오지 않는다는 걸 알 나이이기에 오늘을 더 아끼며 길을 나선다.


지금, 이 순간, 이 바람, 이 빛, 이 사람들 속에서 삶의 모든 감사가 차오른다.


다닐 수 있을 때, 볼 수 있을 때, 숨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부지런히 다닌다. 길 위의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그 속의 우리는 잠시 영원이 된다.


유한하기에 삶은 아름답다. 사라지기에, 지금이 찬란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찬란함 속을 함께 걷는다.


<깨달음 한 줄>

가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삶도 그렇다. 조급해하지 말고, 서운해하지도 말자. 때가 되면 바람이 불고, 마음이 물든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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