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손을 잡고 걷는 섬

느리게, 함께, 제주

by 담서제미

바람이 부드럽게 불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다는 잔잔했다. 좋았다. 더할 나위 없이. 날이 좋았고, 가족이 함께라서 더 좋았다.


남동생의 퇴직을 기념해 떠난 2박 3일의 제주 여행. 이번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머묾’이었다. 비행기 대신 크루즈를 선택했다.


어느 순간, 팔십칠 세인 아버지가 비행기 타기를 힘들어하셨다.


"느리면 어때, 천천히 가면 되지."

이번 여행은 느리게, 느리게 여행이었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자,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수평선을 따라 열렸다. 햇살이 파도 위에 반짝이며 춤추고, 갈매기들이 흰 깃털을 퍼덕이며 하늘을 갈랐다.


바다를 좋아하시는 엄마는 가족실인 배 안 방 통유리너머 바다를 바라보시며, 연신 "좋다, 좋다."를 노래 후렴구처럼 반복하셨다.


나는 배안에서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스토너'를 읽고 있었다. 순간, 들리는 노랫소리.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엄마가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바다를 바라보시면서. 밭고랑 같은 주름에 함박웃음을 짓고 계시는 엄마의 얼굴은 하회탈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인데 변해가는 건 사람이네"


아기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장년으로 이제는 노년으로.

계단을 오르내리실 때마다 힘에 겨워하시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깡마른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그것은 내 엄마의 손이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하나도 안 힘들다. 너희들과 이렇게 같이 있으니, 너희들이 힘들제 내가 힘들다냐."


단 한 번도 부정적인 말을 안 하시는 엄마.


"좋다, 좋아."

"맛나다."

"고맙다."를 입에 달고 사시는 그 복된 말이 그대로 자식인 우리에게 전해져 복이 되고 빛이 된다.


제주에 닿은 첫날, 섬의 바람에는 짠 향기가 실려 있었다. 햇살은 바다 위에서 한 번 더 부서져 우리의 마음까지 환하게 물들였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시간도 조금씩 풀려나갔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를 향하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걸었다. 돌담 사이로 핀 억새가 바람에 흔들렸다. 부모님은 천천히 걷다가 이따금 멈춰 서서 말했다.


"바다 색이 곱다 고와. 냄새도 좋다"
그 말에 나도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가 숨을 쉬는 냄새, 가을이 성숙해 가는 냄새, 삶이 천천히 익어가는 냄새였다.


제주의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고, 밥 한 술에도 사랑이 녹아있었다.


정신없이 한 생을 달려오다, 어느 날 예순이 넘은 큰아들과 큰 딸, 예순을 바라보는 둘째 딸과 함께 하는 여든일곱 살의 아버지와 예든 다섯 살의 엄마와 함께 떠난 여행길은 그 어떤 것보다 애틋했다.


커튼을 젖히면 바로 앞이 바다인 숙소에서 우리는 원 없이 제주 바다를 바라보았다. 제주의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며 방 안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창밖에서는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부모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날이 참 좋다."

"우리 막둥이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좋은 것을 보니 같이 오지 못한 막내가 생각이 나신 거다. 병원을 비울 수 없어 함께 하지 못한.


바닷가를 걸었다. 발끝이 닿을 때마다 모래가 바람처럼 흩어졌다.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맑았다. 햇살에 비친 바닥의 모래결까지 보였다.


남동생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 렌즈 속에 우리가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엄마, 엄마를 찍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손을 흔드는 여동생, 그들을 바라보며 웃는 나. 시간이 사진 속으로 천천히 고정되었다.


저녁이 되자, 하늘이 노을로 물들었다. 바다는 붉게 번지고, 파도는 그 색을 품은 채 밀려왔다. 엄마의 손등 위로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손등 위로 느껴지는 세월의 결,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날들의 무게가 전해졌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세상에 이런 평화가 또 있을까 싶었다.


셋째 날 아침,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짐을 싸며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또 언제 와 보겠냐.” 그 말에 마음이 잠시 멈췄다.


여행은 다시 오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냈다는 증거라는 것을. '우리 이리 와 있으니 이 보다 잘 살아낸 삶이 또 어디 있겠어'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배에 오르기 전, 바다를 한 번 더 바라봤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부모님의 웃음, 동생들의 목소리, 우리의 시간들이 스며 있었다.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여행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 남은 '여운' 이라는 것을.


제주는 그렇게 우리 마음 한가운데 남았다. 더하지 않아도 좋고, 덜어내도 아름다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쉼'으로.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 위에 시간은 천천히 멈춰 있었다.


<깨달음 한 줄>
행복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느린 발걸음 속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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