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세월이 스며 있는 만년필
그건 한순간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만년필이 미끄러져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짧지만 묵직한 소리.
“턱.”
그 소리는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도, 유리가 깨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허리를 숙여 만년필을 주워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검은 촉이 빠져나가 있었다. 펜촉과 피드가 떨어져 저만치에 누워 있었다.
'이걸 어째'
그제야 알았다. 그것은 그냥 만년필이 아니라, 내 시간의 일부였다는 걸.
그 펜은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재직 시절 받은 선물이었다.
그 시절, 나는 직업상담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글로 전하던 사람이었고, 대통령은 그 글을 직접 읽고 댓글을 남기던 시대의 독자였다.
그 펜은 그 시절의 상징이었다. 국민과 대통령이 직접 연결되던 시대, 신뢰와 진심이 살아 있던 순간의 증거였다.
나는 그 펜을 20년 가까이 진열장 깊은 곳에 두었다. 마치 오래된 신념을 보관하듯, 마치 과거의 나를 봉인하듯. 그동안 수많은 키보드와 볼펜이 손을 거쳤지만, 그 펜만큼은 보물처럼 그 자리에 두었다.
그건 나의 기억 속 유품이었다.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불현듯 웹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고를 쓰면서 그 만년필을 꺼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내 글을 읽어주던 그 시절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글을 쓰고 싶었다. 조심스레 펜을 잡았다. 펜촉이 종이에 닿는 순간, 잊고 있던 숨결이 되살아났다. 부드럽게, 단단하게 흘러갔다.
글씨마다 지난 시간의 무게가 묻어났다.
그러다 오늘, 그 펜이 떨어졌다.
그저 평범한 하루의 작은 사고였지만, 내 마음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검정 촉이 떨어져 나간 그 모습은 마치 세월이 부서져 내린 듯했다.
마치 그 시절의 내가 손끝에서 흩어져 버린 듯. 나는 부서진 펜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펜촉은 잉크를 머금은 채 조용히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밤의 문장과,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숨어 있었다. 그 펜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글쓰기의 기술이 아니라, '진심을 잃지 않는 법'이었다.
책상 위에 펜촉과 몸체를 나란히 올려두었다. 하나의 사물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펜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어느 순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여겨졌다.
부서짐이야말로, 다시 손을 대야 할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펜을 닦았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펜은 나에게서 사라진 것이 아니야. 그 펜을 고쳐 다시 쓸 거야.'
그 말이 내 안에서 따뜻하게 맴돌았다.
그건 물건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었다.
부서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다시 세워 쓰면 된다.
글도, 삶도, 마음도.
나는 펜을 천천히 상자에 넣었다. 당장은 쓸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쓸 것이다.
그 펜이 다시 종이 위를 달릴 날이 올 것이다. 그때, 그 잉크는 더욱 진하게, 한결 더 따뜻하게 흐를 것이다.
시간은 흘러도, 마음이 이어주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펜은 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부서진 펜을 고쳐 쓸 날을 기다리며, 그 펜이 남긴 마음으로.
<깨달음 한 줄>
부서짐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