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천천히 가기로 했다

가장 빠른 길은 언제나 조용히, 천천히 열린다.

by 담서제미

장성 백양사로 향하는 길. 추수를 끝낸 들판에는 마른 볏짚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낫과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잘려 나간 줄기들의 짧은 숨결과 땅이 덜어낸 한 해의 무게였다.


텅 비어 있어 더 넓어 보이는 그 논과 밭에는 할 일을 다한 뒤에야 찾아오는 고요, 그 고요가 깊숙이 내려앉아 있었다.


늦가을과 겨울 초입의 산은 이제 더는 화려해지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색을 덜어내고, 자기 안으로 조용히 가라앉는다.


한때는 불처럼 타올랐던 단풍은 스스로의 기억이 되어 나무 발아래 쌓이고, 가지들은 벌거벗은 채 하늘을 향해 오래된 기도를 올린다. 그 기도는 바람을 통해 흘러가고, 바람은 아무 말 없이 능선을 훑으며 지나간다. 산은 그렇게 말없이 계절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산과 들판 사이, 그 어딘가에서 시간은 멈춘 듯 흐른다. 새들의 울음소리도 드물어지고, 사람의 발자국도 잦아든 이 시기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 같다. 그러나 그 흑백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다. 그렇게 쌓인 계절과 땀, 기다림과 포기, 다시 시작될 것을 믿는 어떤 고요한 다짐 같은 것들이.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한 장의 그림 속으로, 여고동창인 우리는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 약사암으로 향하는 길목, 작은 푯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시간의 논리가 뒤집힌 그 문장은 마치 오래된 선승의 한 마디처럼 다가왔다. 빠름이 항상 짧음이 아니고, 느림이 곧 지체가 아니라는 이 단순한 역설.


세상이 당연하게 정의해 온 '속도와 시간'의 공식이, 그 조그만 나무판 앞에서 가볍게 무너져 내렸다. 나는 조심스레 카메라를 꺼내 그 문장을 담았다. 사진 속에는 나무와 하늘과, 그리고 시간의 틈새가 함께 찍혔다.


우리는 잠시 그 푯말 앞에 서서 웃었다. 어쩌면 장난스러운 문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어딘가가 쿡 찔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삶도 늘 그러했다. 빨리 가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지만,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가장 길고 지쳤던 순간들이었다.


반대로, 가장 느리게 걸었던 날들 아무 목적도 없이 골목을 걷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벤치에 앉아 햇빛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던 시간들, 그때가 오히려 순식간처럼 지나갔다.


벗들과 함께 걷는 약사암 길은 가을 한복판으로 이어진 작은 시였다. 발밑의 낙엽은 바스러지며 지나간 시간을 속삭였고,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계절을 품어낸 인내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가을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선명한 단풍색에 감탄하며,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했다. 말보다 침묵이 편한 순간, 그 고요가 우정을 증명하는 듯했다.


천천히 걷는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도 천천히 다가갈 수 있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감정들, 애써 외면해 왔던 나의 마음, 이제는 받아들이고 싶은 나이와 시간의 무게까지. 빠르게 살았기에 놓쳐버린 것들이, 느린 걸음 속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인생은 목적지보다 '걷는 방식'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친구가 약사암의 가을을 담았다)


약사암에 다다르자, 산 위의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말이 없었지만,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지나온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길 위에서 느꼈던 마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푯말을 떠올렸다.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그건 단순한 시간 안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에 대한 초대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간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일 것이다.


<깨달음 한 줄>
인생의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방법은, 때로는 가장 천천히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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