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은 나를 살아 있게 한다
내 놀이터. 퇴직하면서 이름을 붙인 나만의 공간. 그곳에 있는 것은 노트북과 수첩 두권, 만년필, 아직 깎지 않은 연필뿐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수첩에 적어두고, 노트북을 열어 글로 풀어낸다.
누에고치 속에 들어 있는 내 글은 아직 세상에 나올 준비가 되지 않은 문장이다. 바람을 견디기 위해, 시선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감싸 쥔 채 가만히 숨을 고른다. 실처럼 가늘고 느린 호흡으로, 문장은 문장을 덮고, 생각은 생각을 가린다. 바깥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조용한 진동이 계속된다.
그 글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 줄이 태어나기까지 수없이 접히고 풀린다. 마음의 결이 맞지 않으면 실이 끊어지고, 감정의 온도가 낮으면 고치는 단단해진다. 누에고치 속의 글은 늘 느리다. 그 느림은 미루기 것이 아니라 숙성 중이다.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정들이 밤마다 서로를 찾아 손을 잡고, 의미는 형태를 갖기 전까지 침묵으로 버틴다. 누에고치 속에서 문득 나는 지금 몰입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몰두하고 있는 걸까.
두 단어는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다르다. 같은 물에 발을 담갔는데 온도가 다른 것처럼, 겉모습은 닮았으나 몸이 느끼는 감각은 전혀 다르다. 몰두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눈앞의 것만 존재한다. 숨을 참고 달리는 느낌이다. 시간이 사라지고 몸은 닳고 마음은 점점 마른다.
젊은 날,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해야 했고, 버텨야 했고,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성취라는 이름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밤을 새우는 것이 성실함이었다. 쉬는 것은 죄책감이었다.
몰두는 언제나 결과를 요구했다. 끝이 나야만 의미가 있었고 성과가 없으면 낭비라 여겼다. 그 시절 나는 몰두로 많은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몸의 신호를 무시했고 마음의 울림을 지나쳤다. 왜 이 길을 가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묻기에는 너무 바빴고 멈추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숨이 막혔다. 아무리 성취해도 마음이 공허했다. 나는 몰두를 몰입이라 여기며 살았다.
몰두와 몰입이 다르다는 걸 세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몰입은 나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명쾌하게 드러낸다. 몰입할 때 시간의 감각은 흐려지지만 끝나고 나면 마음이 환해진다. 피곤한데도 기분이 좋고, 몸은 지쳤지만 영혼은 가볍다. 결과보다 과정이 기억에 남고 잘했는지 못했는지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남는다.
몰입은 선택이다.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내가 납득한 이유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속도로 들어가는 상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는 것. 몰입에는 억지가 없다. 몰입한 시간은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시킨다.
요즘 나는 글을 쓸 때 몰입을 경험한다. 문장이 잘 풀리는 날도 있고 한 줄도 못 쓰는 날도 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책상에서 일어나면 마음이 고요하다. 그 고요가 좋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써서 뭐가 되나'라고 자책했을 텐데, 지금은 다르다. 오늘의 몰입이 오늘의 나를 살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몰두는 나를 밖으로 데려간다. 몰입은 나를 안으로 데려온다. 몰두는 타인의 기준을 따른다. 몰입은 나만의 기준을 만든다. 몰두는 끝이 있어야 안심하지만 몰입은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이미 완성이다.
이제 나는 몰두보다 몰입을 한다. 더 이상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고 남과 비교하며 달릴 이유도 줄어들었다. 대신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는지가 중요해졌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머물렀는지가.
몰입은 속도가 느릴 수 있다. 하지만 방향이 분명하다. 몰두는 빠르지만 종종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게 만든다. 인생의 후반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몰두가 아니라 더 깊은 몰입이라는 것을.
무엇이든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것을 정성껏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삶을 닳게 하지 않고 빛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오늘도 나는 몰입속으로 들어간다. 숨을 고르고 어깨를 내려놓고 조용히 몰입의 쪽으로. 그곳에서는 결과에 연연하지도, 시간이 나를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로서 충분하다.
<깨달음 한 줄>
몰두는 나를 소모시키지만, 몰입은 나를 살아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