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다
내년 7월 결혼을 앞둔 아들과 예비며느리와 점심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라 그런지, 며칠 전부터 생각만 해도 봄바람이 불었다.
처음 예비며느리를 만나던 날, 아들과 나란히 걸어오는데 어찌나 이쁘던 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우리 집 식구가 틀림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맛있다는 패밀리레스토랑으로 정했고, 예약이 꽉 찼다는 말에 조금 일찍 움직였다. 대기번호가 7번이었다. 이 정도쯤이야, 뭐. 가벼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들이 11시 20분쯤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오자마자 먹을 수 있게 미리 시켜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주문을 넣었다. 수프와 빵, 샐러드, 피자, 솥밥, 스파게티까지. 테이블 위가 차곡차곡 채워졌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바로 그때 전화가 왔다.
“엄마, 톨게이트 근처에서 차사고가 났나 봐요. 사고 수습으로 차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조금 늦을 거 같아요.”
'어떡하지. 음식을 이미 주문해 버렸는데'.
시간이 지나자 나오기 시작한 음식들, 아직 빈 의자 두 개, 식당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조금만 기다리면 오겠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식어갔다.
수프의 김이 사라지고, 피자의 치즈는 굳어갔다. 따뜻함이 빠져나가는 건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조금씩 조바심이 일었다. '오면 시킬 걸, 오면 바로 먹게 하고 싶은 선의가 찬 음식을 먹게 되겠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선택은 되돌릴 수 없었다.
30분이 흘렀다. 아직도 그 자리라는 아들의 말에 가슴이 타들어 갔다. 전화를 한 번 더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기다려야 하나.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누르려던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이 들어왔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어서 와. 애썼다. 음식이 다 식어서 어떡하야."
"괜찮아요. 먹으면 되죠."
불과 몇 초 전까지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꽃이 만발했다.
그 짧은 시간, 불과 몇십 분 사이에 나는 인생의 축소판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늘 계획을 세운다. 시간표를 만들고, 동선을 계산하고, 미리 준비하면 모든 게 순조로울 거라 믿는다. 하지만 삶은 그 믿음을 종종 배신한다. 사건 하나, 변수 하나로 모든 계획은 무력해진다. 정해진 시간은 저만치 달아나고, 준비된 마음은 갈 곳을 잃는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리에 앉고 웃음이 오가기 시작하자 식은 음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데워 먹어도 좋았고, 덜 맛있어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결국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늦었지만 도착했고, 어긋났지만 만났고, 계획과 달리 흘렀지만 결국 함께 있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혼 이야기, 집 이야기, 직장 이야기. 몇 분 전의 일도 어느새 웃음 섞인 추억이 되었다.
이처럼 삶은 늘 주문과 다르게 온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는 아니고, 늦었다고 해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틈 사이로 진짜 삶이 스며든다.
우리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조금 덜 따뜻한 음식을 먹었지만, 마음은 훨씬 더 포근했다. 아들과 예비며느리와 점심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깨달음 한 줄>
삶은 계획대로 오지 않지만, 기다림 끝에 도착한 순간은 언제나 제 몫의 의미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