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문학도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우리의 서사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제철'이 있다면, 대개는 뜨거운 한철을 보내고 시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인연은 계절을 타지 않는다. 1997년, 소설이라는 막막한 바다 앞에서 처음 만난 그녀와 나의 시간이 그렇다. 당시 우리는 마음 맞는 이들과 모여 밤낮없이 작품을 품평하며 서로의 문장을 매섭게, 때로는 따스하게 다독였다. 등단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붙들고 서로의 의지가 되었던 그 시절, 그녀는 내 생의 가장 깊은 속내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나무숲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다 뒤늦게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글을 향한 그녀의 집념은 누구보다 형형했다. 결국 그녀는 보란 듯이 소설가로 등단했고, 연이어 신춘문예 2관왕이라는 경이로운 성취를 이뤄냈다.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성공은 내게 단순한 부러움을 넘어선 거대한 동력이자 자극이었다.
세월이 흘러, 찬란한 성취를 뒤로한 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정년퇴직 후 비로소 온전한 작가의 길로 돌아와 여전히 원고지 앞에 앉아 있다. 그녀의 펜은 멈췄을지언정, 그녀가 내게 심어준 문학적 열망은 내 손끝에 남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인생의 파도는 예고 없이 닥친다. 2014년, 번아웃과 함께 찾아온 대상포진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무너뜨렸다. 숨 쉬는 것조차 통증이었던 그때, 그녀는 긴 말 대신 내 손을 잡고 산사로 향했다. 2박 3일간의 템플스테이. 잠자리가 유독 예민해 낯선 곳에선 눈 한 번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미안함이 앞섰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편한 절집 방바닥에서 이틀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며 묵묵히 내 곁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고요한 기척은 세상 그 어떤 유려한 문장보다 강력한 위로였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치유의 약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치기 어린 습작생이 아니다. 각자의 삶이라는 서사를 써 내려가는 중년의 작가들이다. 가끔 생의 문법이 꼬이고 전개가 막막할 때면 나는 97년의 그 뜨거웠던 합평회와 2014년 고요했던 산사의 새벽을 떠올린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내 생의 가장 정직한 독자이자 지치지 않는 응원군이 되어준 그녀. 비록 그녀의 소설은 멈췄을지라도,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내 글의 영원한 영감이 된다. 소설로 만나 인생이라는 더 큰 작품을 함께 써가는 이 동행이야말로, 내가 삶으로부터 받은 가장 빛나는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