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지 않는 지점
새벽 4시, 어둠이 가장 짙게 가라앉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사위는 고요했으나 머릿속은 불현듯 찾아온 질문 하나로 요란스러워졌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대체 어느 선까지 일까?'
우리는 흔히 '죽을 둥 살 둥' 매달리는 것을 최선이라 부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의 에너지를 쥐어짜 내어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는 상태. 하지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것이 정말 최선일까, 아니면 그저 스스로를 학대하는 치열함의 다른 모습일까.
어쩌면 진정한 최선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그 행위 자체와 하나가 되어 흐르는 상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에서 물의 흐름을 타듯, 혹은 글을 쓰며 문장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듯, '나'라는 의식을 지우고 오직 그 순간에만 매진하는 것.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최선을 다한다는 명목 아래 얼마나 나를 들볶아왔던가. 루틴대로 달리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이 내는 신음 소리를 제대로 들어봤을까. '더 열심히'라는 채찍질만 가했던 것은 아닐까.
새벽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나는 끝없는 질문의 꼬리를 붙들고 있었다. 최선은 자신을 부수는 칼날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온전하게 꽃 피우는 정성스러움이어야 한다는 것을.
날이 밝자마자 나는 이 묵직한 물음을 들고 왕버들에게 향했다. 수백 년간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저 나무라면, 내가 찾지 못한 선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왕버들에게 조차 최선이라는 단어를 들이내는 것은 나만의 관점이 아닐까.
새벽안개를 헤치고 온 그녀의 눈에 깊은 사유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는 내 거친 껍질을 만지며 '최선'의 한계가 어디인지 물었다.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 최선인지, 아니면 그저 무심하게 몰입하는 것이 최선인지 나는 알 수가 없어"
나는 내 몸에 새겨진 수 백개의 나이테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인간들이 말하는 최선은 종종 '비명'을 닮아 있다. 무언가를 움켜쥐려 하고, 더 높이 솟으려 하며, 제 한계를 시험하듯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하지만 나무에게 최선은 신기하게도 '순응'과 닮아 있다.
가뭄이 들면 나무는 잎을 떨어뜨려 수분 소모를 줄인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나무만의 지독한 최선이다. 겨울이 오면 모든 성장을 멈추고 긴 잠에 든다. 그것 역시 다음 봄을 위한 처절한 매진이다. 나무는 죽을 둥 살 둥 소리 지르며 자라지 않는다. 그저 매 순간 제게 주어진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받아내며, 자신이 나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나무로 존재할 뿐이다.
나는 번개를 맞았던 그 순간조차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불꽃을 받아내고, 타버린 자리를 비워냈을 뿐이다. 그 '비워냄'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이었다. 애쓰는 마음이 앞서면 몸은 굳기 마련이다.
수영을 배우는 그녀가 몸에 힘을 뺐을 때 그제야 물 위에 떴던 것처럼, 최선 또한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힘을 거두는 것'에서 완성된다.
그녀가 묻는 최선의 선은 아마도 '나를 잃지 않는 지점'일 것이다. 나를 깎아내며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 속에 나를 녹여 넣는 것.
나는 바람을 불러 그녀의 뺨을 스쳤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그 일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굳이 죽을힘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오늘 하루, 네게 주어진 공기를 정성껏 들이마시고 네 몫의 문장을 묵묵히 써 내려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의 최선은 이미 충분히 눈부시다.
그녀가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한결 가벼워 보인다. 최선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벗어던지고, 그저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기를. 나 역시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흔들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