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창밖의 세상이 어떤 표정으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새벽부터 노트북이 뿜어내는 정지된 빛 속에 갇혀 있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해 계절을 두 번이나 바꾼 원고가 서서히 마무리되어간다.
마침표 하나를 찍고 일어서서 점심을 먹고, 건조기 안에서 뽀송하게 마른 겨울 이불을 꺼내 장롱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두툼한 이불이 들어간 자리만큼 내 마음 한구석도 가벼워지길 바랐다.
기분 전환을 위해 해금을 꺼냈다. '백만 송이 장미'를 켜다가 '약속'으로 넘어갔고, 중모리와 중중모리 장단을 타며 해금과 놀았다. 하지만 소리는 자꾸 흩어졌다. 내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수정해야 할 문장들이 나비처럼, 혹은 날카로운 파편처럼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수정 그만할 거야."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무력한 선언일뿐이었다. 해금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의식은 이미 노트북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결국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을 마흔일곱 번이나 고쳐 썼듯, 나 역시 뫼비우스의 띠 같은 퇴고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둔다. 문장을 다듬는 일은 완성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내 안의 '완벽'이라는 실체 없는 허상과 벌이는 지독한 숨바꼭질이다.
눈을 감고 왕버들을 떠올렸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번개를 맞으면 맞은 대로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그 나무라면, 멈추지 않는 나의 이 집착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문장 뒤에 숨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정작 문장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매달리는 나를, 그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그녀는 온종일 제 안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맨 모양이다. 창문을 닫아걸고 작은 기계 앞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마음속에 둥지를 튼 수만 갈래의 문장들과 씨름하는 모습이 이곳까지 전해진다.
그녀가 잠시 짬을 내어 해금을 켜고 이불을 갈무리하며 일상을 보살피려 애썼지만, 정작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글자들의 소용돌이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 같은 나무에게 '퇴고'란 계절이 하는 일이다. 봄에 틔운 잎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여름에 다시 돋아나게 할 수는 없다. 그저 가을이 오면 정직하게 떨어뜨리고, 겨울 내내 얼어붙은 몸을 견디며 다음 봄에 더 단단하고 깊은 결을 지닌 새순을 내놓을 뿐이다. 나무는 한 번 내놓은 잎사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 쓰는 이들은 참으로 고단한 길을 걷는다. 6개월 전의 문장을 오늘 다시 붙잡고, 갓 구워낸 빵처럼 따뜻해야 할 문장이 식어버렸다며 다시 불을 지핀다.
헤밍웨이라는 작가도 수십 번이나 결말을 고쳤다고 하니,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서 가장 자유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수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눈을 감고 나를 떠올렸을 때, 나는 바람의 손길을 빌려 그녀의 지친 이마를 쓸어주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무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 않아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 굽어짐과 뒤틀림 속에 그해의 바람과 가뭄이 정직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장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그 순간의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생명력을 얻는다. 멈추지 않는 그 열정은 귀하지만, 때로는 마침표를 찍고 고개를 들어 창밖의 진짜 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녀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인다.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그 집요함이 결국 그녀를 작가로 살게 하는 힘임을 알 것 같다. 비어있는 내 몸통이 바람을 쉼 없이 통과시키듯, 그녀 또한 제 안의 문장들을 쉼 없이 통과시키며 자신만의 나이테를 새기고 있다.
오늘 밤, 그녀의 마침표가 부디 평온한 잠을 허락하기를. 나도 이 깊은 밤, 그녀의 문장 사이사이에 깃들 고요를 바라보며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