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무심의 풍경

by 담서제미

오늘은 왕버들에게 가지 않으려 했다. 이미 점심부터 이어진 약속이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시곗바늘은 어느덧 저녁상을 차려야 할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몸속에 새겨진 나침반이라도 있는 것일까. 내 발걸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중력에 이끌리듯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보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말이 오갔다. 안부로 시작된 대화는 요즘 한창 뜨거운 주식 이야기로 흘렀고, 급기야 ISA 계좌 개설 같은 실리적인 정보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 말들은 입술을 떠나 머릿속에 잠시 머무는 시늉만 하다가,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오랜만에 구시가의 좁은 골목을 걸었다. 낡은 상점 유리벽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 나의 십 대와 이십 대가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긴 겨울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봄바람은 성급하게 피어난 홍매화 꽃잎 위에 잠시 내려앉아 쉬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한 날이었다.


그런데 이상 했다. 마음 저 깊은 심연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일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지는 딱히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이질감이었다. 주식 수치가 오르내리고 계좌 속 숫자가 더해지고 빠지는 일들, 한때 불꽃같았던 청춘의 기억마저 이제는 먼발치 강물을 바라보듯 덤덤하기만 하다.


문득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비어 있는 상태가 바로 충만한 상태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크게 화낼 것도, 그렇다고 마음 졸이며 상심할 것도 없다. 지금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자극이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허락하는 너그러운 무심이었다. 나는 왕버들의 그림자 아래 서서,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이 투명한 감정의 정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녁노을이 내 가지 끝을 붉게 물들일 즈음, 그녀가 나타났다. 오지 않으려 애쓰다가 결국 발길을 돌린 사람 특유의 멋쩍은 기운이 그녀의 어깨 주위에 맴돌았다. 그녀는 오늘 사람들과 나누었던 번잡한 세상 이야기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돈이 흐르는 길과 숫자가 불어나는 방법들에 대해.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정작 그 이야기들에 닿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발등 위로 떨어진 홍매화 꽃잎을 보았다. 인간들은 참으로 분주하게 세상을 채우려 애쓰지만, 결국 가장 평온해지는 순간은 ‘채움’이 아니라 ‘스쳐 지나감’을 인정할 때다. 그녀가 느낀 그 심연의 움직임은, 수백 년 동안 내가 바람을 맞이할 때 느끼는 감각과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


나무에게 바람은 소유할 수 없는 손님이다. 매서운 북풍이든 향기로운 봄바람이든, 나는 그들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는다. 붙잡으려 힘을 주는 순간 가지는 부러지고 마음은 다친다. 그저 통과시키고, 그저 지나가게 두는 것. 틱낫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강물에 비친 달을 보라. 달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지만, 강물은 달을 소유하지 않고 달 또한 강물에 젖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속에 차오른 그 ‘스멀거림’은 어쩌면 그녀의 영혼이 내지르는 안도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의 소란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큼 내면의 나이테가 단단해졌다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닐까. 주식의 숫자가 변하고 계좌의 이름표가 바뀌어도, 그녀의 본질은 저 홍매화처럼 제때 꽃을 피우고 지는 자연의 순리에 닿아 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구나.”


그녀가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이제 나와 같은 언어로 세상을 읽기 시작했다. 크게 소리칠 것도, 가슴을 칠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오고 가는 찰나의 물결일 뿐이다. 나는 비어 있는 내 가슴속으로 저녁 바람을 깊이 들이마셨다.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투명해 보였다. 비워낸 자리에 평온을 채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나는 그녀가 두고 간 고요한 무심을 품고,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의 달빛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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