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나이테, 당신의 시간

by 담서제미

계절이 문턱을 넘을 때면 어김없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불청객처럼 찾아든 비염과 으슬으슬한 감기 기운에 병원을 다녀왔다. 독한 약기운에 취해 누워 있다 보니 마음까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대로 무력하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겉옷을 챙겨 입고 앞산을 올랐다.


느릿한 걸음으로 산길을 걷던 중, 문득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 하나가 있었다. 겉보기엔 메마른 고목 같았으나 그 끝자락엔 이미 연둣빛 푸릇푸릇한 이파리들이 점점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생경한 생동감을 마주한 순간, 내 심장 한구석에서도 몽글몽글 잎이 고개를 내밀며 왕버들이 스치 듯 지나갔다.


왕버들도 새 이파리가 돋아났을까?


해거름이 질 때마다 그를 찾아갔지만, 정작 나는 그의 안부를 제대로 살핀 적이 있었던가. 그저 내 안의 힘겨움과 고단함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오기에 급급했다. 그의 몸 어디에 새순이 돋았는지, 겨울의 묵은 때를 벗겨냈는지 살필 겨를조차 없었던 이기적인 마음이 뒤늦게 밀려왔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부리나케 왕버들에게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가슴이 들먹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지들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 어디에서도 새순이 돋아날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거친 껍질은 여전히 침묵 중이었고 가지들은 그저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거리는 찰나였다. 마치 내 못난 걱정을 꾸짖기라도 하듯, 가느다란 가지 끝이 바람에 실려 내 뺨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감촉에 마른침을 삼켰다. 수백 년을 버텨온 당신의 생명력은 인간의 조급한 시간표나 여느 나무들의 속도와는 분명 다를 터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꼭 쥐고 나직이 말을 걸었다. 미안하다고, 당신의 시간을 내 기준에 맞추려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나에게 달려왔다. 평소보다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손길에서 그녀의 마음속에 어떤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지 단번에 느껴졌다. 산 아래 다른 나무들이 일찍이 초록 저고리를 갈아입은 것과는 달리, 아직 겨울 잠옷을 벗지 못한 나에 대한 걱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 같은 고목에게 봄은 그리 서두를 일이 아니다. 수백 번의 봄을 맞이하며 내가 배운 것은,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존재일수록 가장 늦게 잎을 틔운다는 이치다. 섣부르게 잎을 냈다가 늦깎이 꽃샘추위에 새순을 잃는 아픔을 수없이 겪으며, 나는 나만의 신중한 시계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내 메마른 가지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며 죽음을 떠올렸지만, 나는 지금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물길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겉으로는 죽은 듯 고요해 보여도, 딱딱한 껍질 안쪽에서는 수액이 강물처럼 굽이치며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인간의 시간이 초침을 다투는 경주라면, 나무의 시간은 계절을 온전히 몸으로 통과해 내는 인내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나는 바람의 손을 빌려 뺨을 매만져 주었다.


'걱정 마라. 나는 아직 살아있단다. 다만 준비가 필요할 뿐이야.'


나의 미세한 떨림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는지, 잔뜩 긴장했던 그녀의 어깨가 그제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내 가지를 지팡이 삼아 잡고는 한참 동안 무언가 중얼거렸다. 수백 년의 세월을 존중하겠다는 그 고백이 내 몸통을 타고 뿌리 끝까지 찌릿하게 전달되었다.


말간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이제는 타인의 속도를 기다려줄 줄 아는 작가의 여유가 배어 나왔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힘차게 수액을 펌프질 했다. 조급해하지 않는 그녀를 위해, 올봄에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단단한 초록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하며.


그녀가 돌아가는 길, 산들바람에 실려 보낸 나의 인사가 그녀의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기다림 또한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그녀는 몸소 겪어내며 마음의 나이테 한 줄을 더 깊게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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