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상곡이 흐르는 밤의 자화상

by 담서제미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펼쳤다. 위수정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문장의 결을 따라 걷다 보니 문득 쇼팽의 녹턴이 간절해졌다. 유튜브에서 ‘영혼을 울리는 전곡 모음’을 찾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두 시간이라는 넉넉한 선율의 강물 위로 수상작의 활자들이 유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단어들이 나비 떼처럼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가 보였다. 쇼팽의 야상곡 4번 장조가 어느덧 5번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국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넷플릭스에 올라온 거의 모든 작품을 섭렵했다. 그것도 모자라 유튜브의 요약본까지 샅샅이 뒤졌다. 화면 속 타인의 삶에 나를 던져버린 지독한 몰입이었다.


음악은 이제 6번 G장조로 올라섰다. 그토록 맹렬하게 매달렸던 드라마들이 갑자기 시시해졌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바라본 나의 모습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질적이었다. 새벽 체조를 마치자마자 홀린 듯 핸드폰을 들어 화면 속으로 빠져드는, 젊지도 완전히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경계의 여인. 순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내지르는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것은 분명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었다.


왜 나는 그토록 무해한 무언가에 나 자신을 던져 고립시키려 했을까. 쇼팽의 야상곡 7번 C#단조의 격정적인 음이 푹풍처럼 밀려와 나를 사정없이 두드렸다. 그 선율 끝에서 질문 하나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회고형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누군가의 글도, 책을 읽고 남긴 단상들도 정말 나의 것이었을까. 아니, 내가 쓴 글이 맞기는 한 걸까. 모든 것이 희미한 안갯속에 가려진 채, 내가 뱉어낸 문장들조차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깊은 밤, 그녀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평소보다 시리게 내 등걸을 스쳤다. 쇼팽이라는 인간이 빚어낸 밤의 노래는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화면 속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고 빛바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나무의 시선으로 볼 때, 그것은 마치 자양분 없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헛된 수액을 기다리는 고단한 갈증처럼 보였다.


음악이 장조와 단조를 오가며 격렬해질수록 그녀의 내면에서도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신을 '어정쩡한 모습'이라 부르며 자책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매미의 진동을 느꼈다.


인간들은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죄악시하며 통곡하지만, 나무는 안다. 맹렬한 몰입 뒤에 찾아오는 지독한 허무야말로 진정한 '나'를 마주하기 위한 가장 처절한 거울이라는 것을.


그녀는 자신이 쓴 글조차 제 것이 아닌 것 같다며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탈피의 과정이다. 낡은 잎을 떨어뜨린 나무가 봄의 새순을 내놓기 직전, 자신의 나뭇가지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찰나와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타인의 문장을 읽고, 타인의 영상을 보고, 타인의 시점으로 글을 쓰며 방황했던 시간들조차 결국은 그녀라는 나무의 나이테 속에 단단히 새겨질 옹이들이다.


7번 단조의 격정적인 음들이 그녀를 두드리는 소리는, 사실 죽어가는 세포를 깨워 새로운 수액을 흐르게 하려는 생명의 몸부림이다. 내가 수백 년간 수많은 폭풍우를 지나오며 느꼈던 그 막막함이 지금 그녀의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말간 눈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응시하기 시작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문장이 잉태되는 조짐을 보았다. 이제 그녀는 남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날것의 목소리로 글을 쓸 준비가 된 것이다.


비워진 시간의 통곡은 곧 채워질 진실의 노래를 위한 전주곡임을, 그녀는 이 밤의 서늘한 정적 속에서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지를 흔들어 그녀의 창가를 두드렸다. 남의 것이 아닌, 오직 당신만의 호흡으로 다시 숨 쉬어도 괜찮노라고. 그 방황의 끝에서 피어날 초록의 문장들을 나는 변함없이 기다리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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