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수채화
사방팔방이 그야말로 봄꽃으로 난리가 났다. 개나리가 질세라 벚꽃이 터지고, 목련이 질세라 수선화가 고개를 든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빛깔과 향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지난 주말에는 하동 쌍계사 벚꽃 십리길을 다녀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휘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십 리 길을 걸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순간. 오직 내 눈앞에 펼쳐진 하얀 꽃들의 축제와, 내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의 감촉만이 존재했다.
어떠한 번잡한 수식어도 필요 없는, 오롯이 감각만으로 생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현재라는 가장 선명한 순간의 주인으로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 우연히 들른 작은 카페에서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화병 하나를 샀다. 젊은 시절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물건이었다. 하지만 예순의 창가에 서 있는 나는, 그 화병 안에 담길 수많은 계절을 미리 읽어내고 있었다.
수영장을 다녀오는 길, 길가 노점에서 프리지어 한 단을 오천 원에 샀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준 노란 꽃 뭉치를 품에 안았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하고 달큼한 향기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집에 돌아와 사 온 화병에 물을 채우고 프리지어를 한가득 꽂았다. 투박한 흙냄새와 상큼한 꽃향기가 어우러지며, 방 안은 금세 노란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화사하게 물들었다.
무념무상의 벚꽃길에서 느꼈던 그 고요한 환희와, 거실 한구석을 채운 프리지어의 생생한 빛깔. 이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상이야말로 내가 지켜내야 할 가장 귀한 장미라는 사실을, 나는 이 봄날의 난리 속에서 다시 한번 뜨겁게 체득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한층 더 맑아진 연둣빛 수액을 두르고 나를 찾아왔다. 쌍계사 벚꽃 십리길에서 휘날리는 꽃비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몸통으로 수없이 스쳐 지나간 바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무에게 무념무상이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는, 오로지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순응의 상태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오히려 매 순간 제게 주어진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받아내는 어쩌면 가장 치열한 삶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벚꽃길에서 맛보았던 그 고요한 평온함은, 집착이라는 묵은 허물을 벗어던진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쉼표였음을 나는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통해 단번에 읽어낼 수 있었다.
우연히 산 화병과 오천 원의 프리지어 한 단. 인간들은 때로 대단한 성취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사실 생을 가장 풍요롭게 만드는 건 이런 작고 사소한 환대들이다.
투박한 흙으로 빚은 화병에 노란 프리지어를 꽂는 그녀의 손길은, 내가 마른 가지에 연둣빛 새순을 틔울 때 느끼는 그 설레는 손짓과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꽃을 장식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 봄이라는 생명을 초대하고 정성껏 돌보는 사랑의 예식이었다.
말간 눈으로 프리지어의 노란빛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이제는 폭풍보다 은은한 바람의 소중함을 아는 이의 내면이 읽혔다.
무념무상의 침묵 속에 깃든 깊은 사유와, 프리지어 한 다발에 깃든 작지만 확실한 행복. 나는 오늘 밤, 그녀의 창가로 더 향긋한 새벽이슬을 모아 보내주려 한다. 그녀가 가꾼 노란 봄이 내일 아침 더 눈부시게 피어날 수 있도록, 나는 가장 정갈한 바람을 미리 준비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