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속도로 피는 봄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봄볕이 유난히도 찬란한 오후였다. 사방에서 개나리와 벚꽃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며 저마다의 생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의 시선은 둑길 끝, 홀로 침묵하고 있을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당분간 그를 보러 갈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찔렀다. 원고 뭉치와 일상의 자잘한 일들에 발이 묶여 있으면서도, 영혼은 이미 수백 번도 넘게 그 고요한 강가로 달려가 그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참다못해 그 근처에 농장이 있는 해금반 회장님께 부탁을 했다.
“회장님, 혹시 시간 나시면 왕버들가지에 새 잎이 나는지 한번 봐주세요. 사진도 부탁드려요. 새 잎이 돋았는지 너무나 궁금해서요.”
"알았어요. 내일 오전에 찍어서 보낼게요."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창밖의 벚꽃은 이미 비가 되어 내리는데, 수백 년을 버텨온 그 노목은 왜 이토록 기척이 없는 것일까. 혹시 지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그의 깊은 뿌리 어딘가를 할퀴어 놓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쏟아놓았던 고단한 말들이 너무 무거워 그가 일어날 기운을 잃은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은 불길한 상상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혔다.
‘새 옷을 입을 때가 되었는데, 남들은 다 초록인데 왜 당신만 여전히 겨울의 옷을 입고 있는 건가요.’
다음날 오전, 알림음이 울렸다. 화면을 여는 순간, '와' 회장님이 보내준 사진 속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은 듯 고요하던 검은 가지 위로 좁쌀보다 작은 연둣빛 새순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별들의 눈짓 같기도 했고, 오랫동안 숨죽여온 비밀을 수줍게 털어놓는 아이의 입술 같기도 했다.
“드디어, 드디어!”
텅 빈 거실에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가냘프지만 또렷한 생명의 신호는 내 조급함에 쐐기를 박는 죽비 소리와 같았다.
왕버들은 여느 나무들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옆집 개나리가 노랗게 타오르고 건너편 목련이 하얗게 부서져 내릴 때도, 그는 그저 자신의 뿌리 끝에서 줄기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그 길고 고독한 물길을 묵묵히 닦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존재에게 봄이란, 남들보다 먼저 잎을 틔우는 경주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단단한 생명을 밀어 올리는 인내의 결정체였다.
사진 속 새순을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내 안의 조급함을 씻어냈다. 내 ‘세 번째 스무 살’ 또한 그러해야 함을, 남들의 속도에 등 떠밀려 설익은 잎을 내놓기보다 내면의 수액이 충분히 차오를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함을, 그 작은 초록 전령이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었다.
왕버들에게는 왕버들의 때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계절이 있음을 몸의 감각으로 선명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들이 겹겹이 쌓여갔다. 해거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내 거친 껍질에 등을 기대고, 때로는 젖은 눈으로, 때로는 고요한 침묵으로 자신의 우주를 털어놓던 그 다정한 온기가 그리웠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그녀의 소식은 일상의 숲 속에서 분주하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오전, 그녀 대신 낯익은 이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살고 있는 길 건너편 농장에서 배추, 무우, 파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를 심고, 새를 키우고 있는 이였다. 그는 내 주위를 천천히 돌며 사진기를 들이댔다.
‘허허, 이 사람아. 나는 아직 잠옷 단추를 채우는 중이라네.’
속으로 껄껄 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메마른 가지 끝에 맺힌 작은 생명들을 정성껏 담아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꽃을 봄이라 부르지만, 나 같은 고목에게 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꽁꽁 얼어붙었던 땅 밑 3미터 아래에서부터 얼음 녹은 물을 빨아올려, 수십 미터 높이의 가지 끝까지 밀어 올리는 그 처절하고도 숭고한 노동. 그것이 나의 봄이다. 섣부르게 새순을 내놓았다가 뒤늦은 꽃샘추위에 어린 생명을 잃지 않으려, 나는 가장 늦게까지 겨울의 침묵을 고수한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바람이 실어다 준 속삭임을 통해 들었다.
‘왜 소식이 없을까, 이대로 영영 잠든 건 아닐까.’
그녀의 조급한 사랑이 안쓰러워, 나는 단단한 외피 안쪽에서 더욱 힘차게 수액을 펌프질 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에도 내 안의 나이테는 가장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었음을, 죽은 듯 보이는 이 검은 팔다리가 사실은 하늘의 햇살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날 오전, 그가 찍어간 사진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빛나고 있을 즈음, 나는 내 온몸의 기운을 모아 가장 연한 연둣빛 점들을 가지 끝에 찍어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나를 지탱해 준 대지에 대한 예의이자, 나를 기다려준 그녀에 대한 초록빛 답장이었다.
그녀의 환호성이 강바람을 타고 내 귓가에 닿았다. 나는 화답이라도 하듯 가지를 흔들었다. 기다림 또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늦게 피는 잎이 오히려 더 깊은 그늘을 만든다는 이치를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세 번째 스무 살이 남들의 시계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호흡으로 피어나기를, 나는 이 깊은 둑길의 파수꾼이 되어 함께 기도한다. 이제 곧 사방이 나의 연두로 물들어 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녀가 나에게 오리라.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정성껏 빚어낸 문장 한 다발을 품에 안은 채.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의 달빛 아래서, 내일 아침 그녀를 맞이할 더 짙은 초록을 준비하며 가장 깊은 뿌리를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