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하더라

일상 속 행복

by 담서제미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복잡한 시간을 피해온다고 왔는데 대기번호가 16번째다.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지난번에는 대기번호가 30번대였다. 그동안 다른 곳도 다녀봤는데 이곳이 우리 가족 입맛에는 제일 잘 맞아 기다리기로 했다.


_cfb63108-77dd-4990-9d65-15641535cc7f.jpg?type=w1


작년 남편과 딸 생일 기념으로 왔으니 딱 일 년 만이다. 남편과 딸 생일이 비슷한 시기여서 매년 같이 생일파티를 한다. 일 년 전 이곳에서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내년에는 퇴직을 하겠네"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벌써, 일 년이라니.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매번 실감한다. 작년과 올해 가장 큰 차이는 작년에는 퇴직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면 올해는 마음에 평화와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차분히 기다려야 할 거 같아 2층 카페로 올라갔다. 2층에는 우리처럼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긴 기다림에도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기다림 속에는 행복한 마음이 들어 있었다. 배고픔을 잠시 참으면 풍성한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퇴직 전 내 기다림이 그랬다. 퇴직하면 나를 위한 멋진 인생이 어서 오라며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퇴직을 해보니 오랜 시간 직장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막막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취미생활로 하루를 채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해를 받아 생생하게 살아나는 푸른 나무를 보면서, 어찌나 아름답던 지. 그 풍경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바쁘게 살던 시절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잔잔한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평범한 일상 속에 많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퇴직하고 나서 알았다. 쉼을 통해 일상의 가치와 소중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시작하는 하루, 거실 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면서 느끼는 설렘, 정성껏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 가족을 위한 요리, 산책길. 모두가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지만 하나하나가 전부 선물처럼 여겨진다.


예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쳐버리던 순간이었다. 그저 시간에 쫓기며 다음 일을 준비하기에 바쁘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은 순간들이 마음속에 더 깊이 남는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여길지 모를 하루가 매일 새롭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_f28718a6-87b0-4682-b528-6e110a63376b.jpg?type=w1 안빈낙도, 여유와 평화


퇴직 후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동안 북적거리던 일상에서 홀로 남아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글 쓰고, 책 읽고, 요리하고, 혼자 걸으며 보내는 시간 속에서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편안하게 느끼는 순간, 내가 웃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느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나를 찾고 나를 돌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평범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나를 만나고 있다.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예를 들면, 베란다에서 활짝 핀 제라늄을 보거나, 수경재배 식물에 새로운 잎이 올라온 것을 보며 느끼는 충만감이 그렇다. 매년 기관 평가 목표 달성과 성취에만 몰두하며 살던 퇴직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다.


이 작은 행복이 내 삶에 새로이 자리 잡았다. 나를 더 온화하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이 들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나를 웃게 한다. 웃음 짓는 그 순간들이 쌓여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


어느새 남편과 딸 생일파티를 했던 작년 이후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정년퇴직을 했다. 그 시간 동안 가장 큰 깨달음을 얻었다. 비범한 것은 큰 목표나 성취가 아니라, 내가 매일 마주하는 평범함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퇴직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내 삶을 채워주고 있다. '평범한 것'이라고만 여겼던 것들이 삶의 근본적인 가치였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맞이하는 순간, 커피 향이 거실 가득 퍼지며 느끼는 여유로움, 아무 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 진정한 행복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는 법을 배우고 있는 세 번째 스무 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깨달음은 이 순간이다.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한 거라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 순간이 소중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