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글이 되는 순간) 떨어진 은행나무잎에 스며든 빛처럼
12월이다. 회색빛 초겨울 길을 걸었다. 집 근처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오는 길. 떨어진 은행나무 잎들이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밟히고 비에 젖은 잎들 속에서 온전한 행태를 유지하고 있는 잎 하나를 주웠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었다. 은행잎은 내 손에서 부챗살처럼 퍼졌다. 본체를 떠나 소멸을 향해 가는 상태에서도 싱싱했다. 은행잎은 삶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존재처럼 내 손안에서 반짝거렸다. 그 속에 생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이 삶의 황혼기에 이른 내 모습과 닮았다.
사촌시누가 운영하는 식당
토요일에 시댁 사촌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막내다. 나이도 서열도 맨 마지막이다. 이 나이에 막내 대접을 받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퇴직 전에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 삶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모임이 있어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어쩌다 한 번씩 나가곤 했다.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
이번은 내가 퇴직하고 두 번째 모이는 날이었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사촌 시누네는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도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볼 때마다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사촌 시누는 음식 솜씨도 좋을 뿐만 아니라 장구도 잘 치신다.
사촌 시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은 장구 장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단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가볍고 경쾌하기도, 깊고 묵직하게 울리기도 하니 말이다. 풀어졌다 조였다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리듬 속에서 인생의 멋을 만들어간다.
시누들의 이야기도 그랬다. 어떤 삶은 가벼운 장단처럼, 어떤 삶은 묵직한 장단처럼 느껴졌다. 첫아이가 12살, 둘째 아이가 10살 때 남편과 사별해서 두 아들을 어디에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게 잘 키웠다는 시누의 말은 북소리 같았다. 끝없이 반복되는 무거운 소리 속에는 삶의 힘이 들어 있었다. 때때로 날카롭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리듬은 잃지 않고 있었다.
70살이 넘은 사촌 시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장구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을까? 깊은 북소리일까? 날렵한 채편일까? 장구 소리는 그것을 치는 두 손에 달려 있다. 강하게 약하게 부드럽게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삶 또한 장구처럼 우리의 손에 달렸다.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서툴면 서툰 대로 하나의 곡이 된다.
글을 쓰면서 하얀 책표지 위에 올려놓은 은행나무 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떨어진 은행잎도 장구의 리듬과 닮아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은행나무 잎은 북소리처럼 묵직했으리라.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여겼겠지만 내 옆에 놓인 잎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채편의 경쾌함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잎은 나무에서 떨어졌어도 여전히 자신의 빛깔과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 빛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다른 이에게 새로운 생명이 되기도 하는.
시누들이 살아온 길, 내가 살아온 길, 떨어진 단풍나무 잎, 장구 가락이 모두 하나의 연결선이었다. 시댁 사촌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삶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해 준 선물이었다. 각자 짊어진 무게가 다르기에 그 무게가 주는 아름다움도 각각이었다.
나는 오늘도 장구 장단에 맞춰 삶을 두드린다. 리듬이 어긋나도 괜찮다. 은행나무처럼 땅 위에 떨어져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장구 장단에 가락을 타고, 떨어진 은행나무 잎에 스며든 빛처럼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