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평생 처음으로 김장을 했다.
연일 마음이 편치 않다. 잔잔한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평온하던 일상이 무너져 내린 건 2024년 12월 3일 밤부터였다. 정확히 오후 10시 30분 이후였다.
다른 날보다 피곤해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계엄령이 내렸어요"라고 했다. "가짜 뉴스겠지. 2024년에 무슨 계엄이냐" 가짜 뉴스라 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갔더니 진료를 하던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잠 한숨도 못 자고 출근했다며 2024년에 이게 무슨 일이냐고 했다. 우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내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며칠째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나는 평온하게 살고 싶다. 심심하리 만치 아무 일 없는 잔잔한 일상을 살고 싶을 뿐이다. 친정 부모님이랑 오손 도손 김장을 하면서 막 버무린 김치에 수육을 싸서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일상 말이다. 그 평범한 바람이 침탈당하고 있으니 이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지난주 금요일 친정 부모님과 김장을 했다. 마음이 편안해야 할 자리는 계엄 뉴스로 도배가 되었다. 육십 평생 처음 해보는 김장이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 되었다. 먼 훗날 나는 말하겠지. "내가 육십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김장하던 날 그때 온 나라가 시끄러웠어. 왠지 알아. 하필이면 그 주 화요일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어. 그 주에 김장을 한 거지. 어찌 잊을 수 있겠어"를 시작으로 2024년 12월 3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지.
<육십 평생 처음으로 김장을 했다>
원래 이 글을 쓰려고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예순 살이 되어 처음 해보는 김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동안 워킹맘으로 살면서 친정 부모님 특수를 누리며 살았다. 단 한 번도 김치를 담아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김장 때가 되어도 부모님은 일하는 사람이 무슨 김장을 도와주려 하느냐. 나중에 너 퇴직하면 그때 같이 하자고 하셨다.
그날이 바로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김치를 버무린 날은 금요일이었지만 부모님은 그 주 내내 김장을 하신 거나 마찬가지셨다. 월요일에 배추를 사서 절이고 수요일 절인 배추에 물을 빼고 목요일 김치에 넣을 재료를 만들고 금요일에 배추를 버무리는 작업을 하셨다. 나는 단지 하루 김치를 버무린 일만 했을 뿐이었다.
육십 평생 처음으로 팔십 중반 부모님과 함께 한 김장. 내 유전자 속에는 이미 김장이 새겨져 있었다. 버무리기만 한 것뿐인데, 팔십 중반 노모는 "우리 딸 처음 해봐도 잘하네"라며 계속 칭찬을 하셨다. "엄마가 다 해 놓으신 거 나는 버무리기만 한 건데 이건 누구나 잘해요" "아니여, 내가 본 께 니가 잘해. 딸이랑 한 게 좋네"라는 엄마 말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김장철이 되면 엄마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여 김장을 하셨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젓갈과 고춧가루와 갖은양념을 버무리며 "맛나네. 간이 딱 맞아"라며 흥겨워하셨다. 거기에는 서로를 향한 온정이 있었다.
배추를 버무리기 전에 엄마는 먼저 시범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버무려야 맛이 배는 거여"라며. 그 손길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노하우가 숨어 있었다. 부지런한 엄마 손등에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훈장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부모님과 같이 이렇게 김장을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앞으로 몇 번이나 가능할까? 김장 속에 담긴 배추 한 포기, 양념 한 줌이 그냥 음식의 재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손끝에서 시작된 추억이자, 나를 키워준 세월의 흔적이었다.
팔십을 넘긴 부모님과 육십의 내가 함께 만든 김장. 그것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깃든 한 편의 서사시였다.
김장을 해 보니 김장을 한다는 것은 배추와 양념을 버무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었다. 한 집안의 손맛이 전해지고 세대를 잇는 기억의 고리였다. 그런 풍경들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지금 우리는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이제는 김장하는 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있고 어디서나 손쉽게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머지않아 김장도 한때의 전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삶이 편리해진 만큼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문화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자란다. 그 자리가 비어버리면 다시 원상 복귀하기 쉽지 않다. 김장이라는 풍경 속에 깃든 서민의 삶과 이야기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예순 살이 되어 처음 해보는 김장과 2024년 12월 3일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저장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