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일어날까, 말까. 잠에서 깬 순간부터 나 자신과 싸움은 시작된다. 나이가 들면 이런 자잘한 갈등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시던 부모님을 보고 자란 나는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드는 줄 알았다. 살아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예순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잠과 타협하고 있었다. 그것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건 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학생 때부터 굳어진 거라 일어날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문제는 '꼭 일어나야 돼, 이제는 퇴직까지 했는데 더 누워있고 싶으면 그래도 되잖아' '아니야 자꾸 이러면 계속 나태해져 안돼'라는 두 마음이 매 번 줄다리기를 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늘 애쓰는 사람이었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틈만 나면 나를 쥐어짰다. 직장 생활할 때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인상을 남기려 애썼다. 가족에게는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려 했고, 나 자신에게조차 실망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 삶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른세 살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28년간 일속에 파묻혀 살았다. 쏟아지는 민원, 답을 찾으려 애쓰는 순간들, 동료들과 치열한 논의들. 그 모든 순간에는 내 자리가 분명히 있었다. 퇴직 후 그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직업인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사는 법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퇴직 후 시간은 낯설었다. 늘 애쓰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때마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오늘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쓸모 없어진 건 아닐까?" 마음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퇴직해서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산책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의자에 앉아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는 할머니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놀 사람은 아니고 퇴직했구먼. 이제는 좀 쉬어야 제"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쉬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그날 이후였다. 내가 쉬는 것을 두렵게 느끼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것은. 그것은 '애쓰는 나'로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애쓰지 않는 내가 어색했다. 그러니 새벽마다 일어나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세찬 바람이 불었다.
그것을 깨달은 이후 "오늘은 애쓰지 말아 보자"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 앞산에 아침해가 떠오르는 모습 속에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자 했다. 읽고 싶었던 책 몇 장을 넘기다 말고, 오래된 사진들을 보다가 걷고 싶을 때 호수 공원을 거닐었다. 애쓰지 않으니 모든 순간이 새로웠다. 어쩌면 이렇게 소소한 하루가, 내가 두려워했던 공허함을 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 후 삶은 직업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애쓰던 습관을 내려놓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직장에서 벗어 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하루하루 작은 연습을 통해 배웠다. 애쓰지 않아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간다는 것을. 삶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겁지 않았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태양은 뜨고, 바람은 불며, 꽃은 피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은 굴러갔다.
물론 모든 순간을 애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힘을 다해야 할 때가 있고, 최선을 다해야만 의미가 생기는 일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애씀 속에서도 멈출 순간을 찾는 것이다. 우리가 끝없이 애쓰는 것만이 아니라 애쓰지 않다도 괜찮은 날들이 필요하다.
퇴직 후 일 년은 애쓰지 않는 나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퇴직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바쁘게 달려가던 시간 속에서는 지나쳤던 것들. 아침에 음악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유, 베란다에 핀 꽃들과 나누는 인사,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운 창문가의 따스함. 모든 것이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 그것들을 볼 여유가 없었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나를 위한 온전한 쉼이자, 무엇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나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애쓰지 않는 날들 속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배워가고 있었다.
퇴직 후 불안과 두려움은 내가 만든 상자였다. 나는 그 상자 속에 갇혀 애쓰는 삶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이제는 안다. 그 상자 밖으로 나오는 법을.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애쓰지 말자. 네가 부족해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는 여전히 충분히 괜찮아."
그렇게 조금씩 나는 퇴직 후 삶 속에서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고 있다. 애쓰지 않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장 나답게 살고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