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원과 보리쌀 3포대, 쌀 1포
386세대, 나는 한때 그렇게 불렸다. 변화를 이끌던 시대의 주역으로. 민주화와 경제 성장의 중심에 섰던 세대로. 문득 궁금했다. 사전에서는 386세대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386세대를 검색했다.
국어사전에는 차세대 신진 세력. 1990년대부터 사용되던 용어로서 나이가 30대면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90년대 초에 286컴퓨터가 386으로 바뀌면서 차세대를 상징하는 비유로 쓰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386세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세대라고 나와 있다.
이제 그들이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한다. 나는 그들을 686세대라 부른다. 386세대로 한 시대의 주역이었던 그들. 이제 60대면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386세대로 한때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이들에게 은퇴란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은퇴가 단지 직업에서 퇴장이 아닌 사회문화에 변화를 예고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은퇴가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닌, 인생 2막에 대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리라는.
<4만 원과 보리쌀 3포대, 쌀 1포대>
'60년생이 온다'를 쓰려면 내 부모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39년생인 아버지는 해방 전과 후를 다 경험하셨다. 가난과 혼란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살아온 아버지는 내 세대를 있게 한 토대였다.
아버지를 인터뷰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서 뭣하려고"
"아버지가 우리의 역사 시잖아요."
"역사는 무슨"이라고 하시면서도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랑 4대가 사시던 곳을 왜 떠나셨어요"
"왜 떠나긴, 밥 먹고살기도 힘든 곳에서 그대로 살다가는 너희들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겠구나 싶어서 나왔지."
"내가 4살 때였죠."
"니가 7살이었다."
"아, 그래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4살 때 온 줄 알았어요."
아버지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32살이었다. 32살에 아내와 7살, 5살, 2살 된 자식을 데리고 4대가 살던 고향을 떠나셨던 내 아버지. 재산이라고는 단돈 4만 원과 보리쌀 3포대, 쌀 1포대가 전부였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간살이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버스를 탔을 아버지. 그때 마음은 어땠을까?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갈 곳은 며칠 전에 먼저 광주로 올라와서 잡아놓은 방 한 칸뿐이었다.
가져온 4만 원을 방값으로 주고 나니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다는 아버지. 1939년생인 아버지는 가난과 전쟁, 시대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았다. 농사로는 자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줄 수 없다고 믿었던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도시라는 낯선 세계로 우리 가족을 이끌었다. 땅과 하늘에 의지하던 농촌을 떠나 물질문명에 의지해야 하는 도시로 이주는 아버지에게도 큰 모험이었다.
아버지는 기술을 배워야 살아남겠다는 생각에 다음 날 배관설비를 하는 현장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기술이 없으니 하루 일당이 거의 없었다. 이대로는 온 가족이 굶어죽겠다 싶어 연탄공장에 들어갔다. 새벽 4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 꼬박 20시간 일을 하고 받은 일당이 800원이었다. 아버지는 연탄공장을 4개월 만에 관뒀다.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아버지가 시작하신 일이 보일러 설비였다. 평생을 노동자로 사셨던 아버지는 그 일로 자식 넷을 대학까지 보냈다. 64년생, 66년생, 69년생, 71년생 4명 자식을.
나는 그런 아버지의 발자취 위에서 자라났다. 새벽마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시던 아버지. 혼자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어 때로는 공사장에서 때로는 전단지를 돌리며 갖은 부업을 하셨던 어머니.
부모님은 일을 하러 가시면서 나에게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다. 나는 동생들을 돌보는 법을 몰랐다 방문을 열면 바로 앞이 도랑이었다. 2살이었던 여동생은 그 도랑에 자꾸 떨어졌다. 내 키는 도랑에 빠진 동생을 끄집어 올리기에는 너무 작았다. 시커먼 물이 흐르는 도랑 속에서 동생도 울고 나도 울었던 그 집. 연탄가스 중독에 걸려 실려갔던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또렷한 그곳. 내가 국민학교 3학년까지 그 곳에서 우리 가족은 살았다. 부엌이 딸린 방 한칸에서 다섯 식구가 여섯으로 늘었다. 지금은 병원장이 된 막내가 그 곳에서 태어났다.
이야기를 들으며 자꾸 코끝이 찡해진 나는 아버지에게 농담을 던진다.
"울 아버지 출세 하셨네. 하셨어. 시골에서 4만원 가지고 올라오셔서 동장님 큰아들에 병원장 막내아들, 공무원 정년퇴직하고 작가로 살고 있는 큰딸에, 전문직 막내딸, 대기업 임원 사위까지 두셨으니 원도 한도 없으시겠네."
내 말에 아버지는 "이 놈의 자식, 애비를 놀리네."라고 하시면서도 "니들 덕분에 어디가서도 기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희생 속에서 나는 386세대로 자랐다. 여기에는 어머니도 포함이다. 4만원과 보리쌀 3포대, 쌀 1포대로 시작된 아버지의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386세대를 넘어 686세대 가 된 내게 남은 과제를 깨닫게 한. 이제는 내가 다음 세대를 위해 보따리를 열어줄 차례다.
386세대에서 686세대가 된 나를 넘어 그 뒤에 이어질 세대를 위해 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