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모든 사람들이 친구였다.
4대가 살던 터전을 떠나 부모님이 자리를 잡은 곳은 토착민이 거의 없는 달동네였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의 우리와 같았다. 고향을 떠나 집값이 싼 곳을 찾아든 사람들. 내가 살던 곳은 버스가 다니는 곳에서 한참을 걸어 도착할 수 있는 산 아래에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소박했지만, 따뜻한 정과 나눔이 넘쳐난 곳이었다. 그 시절 가난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하지만 배고픔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한 가족처럼 서로를 챙겼다. 아이들은 이웃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골목에는 연탄불에서 올라오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밥때가 되면 연탄불 연기가 피어올랐다. 각 집마다 부뚜막에서 밥 짓는 냄새가 골목을 감쌌다. 밥때가 되어도 옆 집에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솥에서 밥을 퍼 옆집에 갖다 주라고 하셨다. 어느 집이든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때면, 옆집에서 따뜻한 국 한 그릇이 건너갔다. 나물 하나라도 오갔고 김치 한 포기도 나눠졌다.
밀가루 죽, 고구마, 옥수수, 모든 것이 이웃과 같이였다. 특히 여름이 되면 우리 집에는 수박과 참외가 넘쳐났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놀렸다. “그게 어찌 가난한 집 이야기냐고. 그때 당시 수박, 참외는 귀한 과일이었어”라고. 부농이었던 외가에서 올라온 수박과 참외로 동네잔치를 할 정도였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 물이 가득 담긴 큰 대야에는 수박과 참외가 둥둥 떠 있었다. 어머니는 늘 그 과일을 이 집 저 집 나눠주셨다.
겨울이면 김장은 동네 행사였다. 수돗가에는 큰 대야가 줄지어 있었다. 동네 엄마들이 모여 앉아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버무렸다. 김장하는 날이면 나는 신이 났다. 그날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갓 버무린 김치를 찢어 막 삶은 돼지고기를 싸서 한 입 베어 물면, 짭조름하면서도 매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모든 집이 돌아가면서 김장을 했지만, 할 때마다 김치는 온 집으로 배달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동네에 있는 모든 집의 김장 맛을 다 봤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겨우내 온 동네 식탁을 풍요롭게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렵던 시절,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 덕분이었다. 작은 것 하나도 서로 나눠먹었던 그 마음이 가난했지만 배가 고프진 않게 했다. 동네는 작은 세상이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 기대어 살아갔다. 동네에서는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다. 서로를 위하고, 보살피며 우리는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웠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우리는 부족함을 몰랐다. 배고픈 친구가 있으면 자연스레 밥 한 숟갈을 보탰다. 힘들어하는 이웃이 있으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던 그 시절은 생존이 아닌, 따뜻한 공존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 가치 속에는 어린 시절이 들어있다.
나눔과 정이 있던 그 시절, 가난했지만 결코 배고프지 않았던 유년 시절. 그 따뜻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가난했지만 정이 넘쳤던 그 시절. 그것은 동네 공동체였다. 그 따뜻한 마음만큼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