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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우리 동네에도

어딜 가나 잘살아보세가 울려 퍼졌다

by 담서제미

어려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 중 하나가 “잘 살아보세!”였다. 수시로 스피커에서는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삼절은 몰라도 일절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금 수나 강산 어 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꾸어가면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도 우리 것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우리 동네 산 밑에 있던 초가도 사라졌다. 흙길이었던 골목은 시멘트가 발라졌다. 방학이나 명절이면 버스를 타고 내려가던 시골 도로는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로 변했다. 온돌방에 보일러가 깔리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큰 건물과 학교 공사까지 했던 사장이자 근로자였다. 아버지가 하셨던 공사 규모는 제법 컸다. 다른 분들이 트럭을 사고 자동차를 구입할 때도 아버지는 자전거로 현장을 다니셨다.


아버지는 새벽 4시면 집을 나섰다. 밤이면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계셨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은 말술이었다. 술로도 성실로도 끈기와 깡으로도 아버지와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는 공사를 할 때면 그때 당시 으레껏 따르던 돈봉투를 단 한 번도 줘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꼿꼿하고 강직한 성격 때문에 쉽게 갈 것도 그만큼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런 성격 때문에 멀리하던 사람들도 꼼꼼하고 성실하게 정확하게 일처리를 해 내는 아버지를 인정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공부만 하기를 바라셨다.


도시에는 연탄가스 냄새와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가득했다. 버스에 몸을 끼워 넣듯 출근하는 사람들, 도시를 떠도는 노동자들, 허름한 판잣집에서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섰다. 기계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는 생산직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전봇대에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갈수록 농촌 인구는 줄어들었다. 명절이나 방학 때 내려가면 할머니는 동네 누구도 논과 밭을 팔아 도시로 갔다고 하셨다. 자식들이 떠난 빈자리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키셨다. 남아 있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6·25 때 팔이나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그 사람의 팔에는 쇠 갈고리가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이 보이면 냅다 도망쳤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그 아저씨가 할머니집에 놀러 왔다. 가까이서 본 아저씨 얼굴은 온화했다. 눈깔사탕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 아저씨를 가까이서 본 이후 나는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도 불었다. 흙길이 시멘트길로 변했다. 초가지붕이었던 할머니집도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었다. 농촌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삼촌들도 고등학교를 광주로 왔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초롱불이었던 할머니집에도 전기불이 환하게 켜졌다. 흙투성이 었던 도로가 포장이 되었고 넓어졌다. 허름한 거리들이 점점 활기를 찾았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늘어났다. 비만 오면 질퍽거리던 길이 반듯한 인도로 바뀌었다.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도시가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단돈 4만 원을 가지고 자식 넷을 대학까지 보냈던 부모님 삶이 쉬웠을 리 없다. 하루 종일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로 사장으로 살며 자식교육을 시키고 생계를 유지했던 아버지, 갖은 부업거리를 하면서 어떻게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일했던 어머니. 그 두 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가난한 그 시절. 국민학교 때는 밴드부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을 해주셨다. 없는 형편에 옷을 맞춰 입히고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중학교 때는 사범대 수학교육과에 다니던 대학생에게 수학과외도 받게 했다. 피아노도 배웠다. 하지만 피아노는 한 달 만에 관둬야 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그것은 사치였다. 가르쳐야 할 자식은 나뿐만 아니라 내 밑으로 셋이 더 있었다.


아버지는 흑백텔레비전을 사셨다. 우리는 밤이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장면, 자동차가 공장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과정을 봤다. 농촌에서 살던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풍요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새벽이면 일을 하러 나가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농사를 짓던 굽은 허리에서, 새벽마다 시장을 오가던 어머니들의 손길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공부하던 그 세대들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귀에 박히게 들었던 ‘잘 살아보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을 실천하고 이뤄낸 역사였다.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만든 기적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난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셨던 내 부모님 얼굴이 떠오른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유산은 그 희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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