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담의 토대가 되었던 삶의 여정
1989년 2월, 대학 졸업 후 1년 만에 결혼했다. 88 올림픽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시작된 내 인생, 그것은 또 다른 경기였다. 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면, 결혼은 나라는 개인이 또 다른 세계로 뛰어든 시작이었다. 변화는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동시에 찾아왔다. 주저앉을 것인가, 일어설 것인가. 그 질문은 내 삶 곳곳에 숨어있었다.
당시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경제 성장 열풍이었다. 모두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앞만 보고 달리던 시기였다. 나 역시 ‘안정된 미래’를 꿈꾸며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에 대한 환상도 기대도 없었다. 사회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던 나는 가정이라는 작은 배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탔다. 엉겁결에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 첫날밤 대성통곡을 했다. 결혼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전업주부였던 나는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읽었고 그것도 지치면 붓글씨를 썼다. 결혼은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내 부케를 받아 나보다 4개월 늦게 결혼한 친구와 나는 어서 빨리 마흔이 되기를 원했다. 마흔이 되면 인생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둘 다 엉겁결에 한 결혼이라 적응이 쉽지 않았다.
대기업에 다녔던 남편은 거의 매일 야근이었다. 내 영혼은 날마다 쪼그라들고 있었다.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뒤돌아보니 매번 중요한 순간에 도망을 쳤던 내 모습이 보였다. 겉으로는 한없이 평온해 보였지만 내 마음은 곪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첫아이가 생기면 서였다. 입덧이 심해 오 개월 동안 토하면서도 태교 했다. 어딘가에 정신을 붙잡아 둘 곳이 필요했다.
첫아이가 태어났다. 이 년 후 둘째 아이도 태어났다. 아이들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새근새근 잠든 모습, 종종거리는 발걸음 모든 게 찬란했지만,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둘째 아이를 낳고 찾아온 산후우울증은 우물보다 깊었다.
“왜, 그래. 힘을 내. 기운을 내란 말이야.” 그 말들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운을 내고 싶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키워야 할 자식이 있었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그나마 나를 움직이게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매일매일 작은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결혼하면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닿게 하겠다던 남편은 주말에도 바빴다. 엄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내 마음속에서 때로는 엄마라는 책임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나 자신도 변해야 했다. 더 이상 꿈만 꾸던 청춘이 아니었다. 내 선택이 가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두려움이자. 나를 성장하게 하는 힘이었다.
주저앉을 것인가, 일어설 것인가? 나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살아야 했다.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시대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살 수 없었다. 적응은 단순히 환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아이들이 커 갈수록 더 깊어졌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지 않기로 했다. 첫 아이 손을 잡고 둘째 아이를 등에 업고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쥐뿔도 없으면서 쥐뿔이 있는 것처럼 살았던 내 모습이 보였다. 가장 큰 깨달음은 ‘완벽할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었다. 변화에 두려워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었다. 상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 밑바닥에 다가갔다. 빈약한 나를 인정하기 두려워 늘 도망쳤던.
삶은 완벽한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를 자학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아침 기도로 시작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내 이십 대 전반기는 대학 생활, 후반기는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은 것으로 끝이 났다. 대학을 휴학한 후 노동 현장에서 시내버스 안내양을 했고, 교정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시위 현장에 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노동 현장에서도 학생운동에도 어정쩡한 회색분자였다.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살았다. 다가오면 도망쳤고, 그 후에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반복했다. 삶은 그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내 이십 대에게 말해 주고 싶다.
“잘했어. 비록 방황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너는 너대로 잘살았어. 계속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끝없이 나아갔잖아.”
이제 나는 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나만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적응이란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운 속에서도 용기를 내는 것이자, 그 과정이 바로 삶이었다. 젊은 날 방황과 고뇌가 28년간 내 직업상담의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