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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에 만난 어린 왕자

프롤로그, 하늘에서 떨어진 어른아이

by 담서제미


열한 살,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났던 날, 하늘에는 별이 있었다. 그 별에는 나의 '어린 왕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늘 나와 함께했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그는 차츰차츰 희미해졌다. 간혹 그가 떠오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그조차 사라져 버렸다. '어린 왕자'는 머나먼 우주로 떠나 버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자리에는 예순을 훌쩍 넘긴 내가 있었다.


그가 나에게 다시 온 것은 담양 지실에 있는 카페 B612에서였다. '아, 이건 뭐지'. 낯익은 이 이름, 순간 전율이 일었다. 잊고 살았던 별. 내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그렇게 나에게 다시 왔다. 예순이 넘은 나에게. 그날 B612 카페에 앉아 '어린 왕자' 책을 주문했다.


한때는 외우다시피 했던 글이었다. 그림만 봐도 앞 문장만 봐도 다음 이야기가 줄줄 나오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이야기가 예순이 넘어서야 진심으로 와닿는 언어라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끊임없이 무언가 되어야 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항상 옳고 강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때마다 내 별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문득, 예순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사막에 앉아 있는 나를 보았다. 고장 난 듯, 껍데기만 쓰고 있는 채로 앉아 있는. 나침반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는 겉모습만 성인인 어른아이를.


그때 내 나이 열한 살 때 나에게 왔던 그 아이가 다가왔다. 기다란 망토를 쓴 맑은 눈동자를 가진 '어린 왕자'가.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어린 왕자는 맑디 맑고 깊디깊은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떨어진 것일까? 대답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랬다. 나는 떨어진 것이었다. 나에게서, 사랑에서, 꿈에서.


그 아이와 함께한 순간은 인생 찰나에 불과했지만, 깊이는 삶 전체보다 더 깊었다.

이 글은 예순의 내가, 열한 살에 내 친구였던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난 이야기다.


사는 동안 수많은 보아뱀을 보았다.

수많은 코끼리를 놓쳤다.

모자라고,

이상하다고,

쓸모없다고,

치부했던 것들 속에 누군가의 꿈과 두려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시선이 있었다.

책상 위의 지우개도, 꽃잎 하나도,

로봇도, 공룡도 이야기로 변했다.

그 무한한 세상 속에서 작가였고, 마법사였고, 비행사였다.


이제는 설명이 없는 그림 앞에 서면 망설인다.

"이게 뭐지?"라고 묻는 대신

"뭐라고 설명이 되어 있지?"라며 정리부터 하려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감각은 둔해진다.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걸 애써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설사 설명을 듣더라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만난 '어린 왕자'는 바로 이 지점을 콕 찌른다.


"너는 아직도 그 안을 볼 수 있느냐"라고.


인간은 자신이 이해한 만큼만 세상을 본다.


설명이 없다면 그림은 단지 형상일 뿐이다. 어른들은 그것을 모자라고 했다. 단 한 번도 그것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이라는 발상을 해본 적이 없으니. 현실에 갇혀 상상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과 논리로만 세상을 보려 한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본질은 보지 못한 채. 보아 뱀 속에 들어 있는 코끼리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육십 년이 넘게 살아오는 동안 몇 번이나 누군가의 '보아 뱀 그림'을 '모자'라 단정했을까? 그 세월 동안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다그치며 침묵하게 만들었던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으리라.


이제야 알겠다.

어린 왕자의 모든 이야기들은 삶을 꿰뚫는 비유라는 걸.

어른이 된다는 건, 코끼리를 잃어버린 일이라는 걸.

모자를 모자라고만 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걸.


그래도 아직, 나의 어딘가에 그림을 보며 웃던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나는 다시 그 속을 볼 수 있으리라.


더디더라도

조심스러워도

괜찮다.


보아 뱀 속의 코끼리를 찾으려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어른'이 아닌 '어른 아이'로 살아가는 길일 테니까.


'어린 왕자'가 나에게 속삭인다.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그림을 다시 들여다봐.

자, 이제 마음으로 보렴"


천천히 조용히 들여다본다.


코끼리는 아직 거기에 있다.


나는 다시 '어른아이'가 되려 한다.


그 아이는 묻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내 안에서 무너졌던 모든 것들을 다시 천천히 세워나가게 한다.

이 글이 당신 마음의 사막에도 닿기를 바란다. 오래 잊고 지낸, 그 아이와 다시 눈을 맞출 수 있기를.


공지) 『어린 왕자』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쓸 어른을 위한 에세이이자 동화입니다. 별과 문, 그림자와 마음속 아이를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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