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 양
고요한 새벽, 바람마저 잠들어 있는 시간 나는 어둠에 잠긴 세상 속 고독을 껴안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 세상과 단절된 듯한 침묵이 어둠과 섞여 길을 잃고 있었다.
사물과 어둠의 경계가 흐릿한 세상에서 들리는 것은 내 숨소리뿐이었다. 들숨과 날숨이 마치 박자를 맞추듯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풀벌레들마저 잠들어 있는 새벽은 외로움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 무렵, 나를 깨운 목소리가 있었다.
"저...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처음에는 꿈일 거라 여겼다. 다시 어둠 속 침묵을 응시했다. 그때 또다시 들린 소리. 너무나 또렷하고 간절한 목소리였다.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고 여린 소년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별빛보다 깊었다. 얼굴 표정은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린 듯 기대에 차 있었다. 그는 내가 열한 살에 만났던 어린 왕자였다.
"세상에, 어떻게 여길 왔어."
내 목소리가 새벽 고요 속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는 경이와 놀람이 들어 있었다.
어린 왕자는 내 말에 답을 하는 대신, 양 한 마리만 그려 달라 했다.
"왜 하필 양이야?" 내가 물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다보다 깊고 별 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백 마디 말보다 더 간절했다. 그는 나를 눈빛으로 설득했다.
나는 종이와 볼펜을 꺼냈다. 어린 왕자 앞에서 볼펜이라니. 볼펜을 꺼내면서 이럴 때는 폼 나게 만년필이 있어야 하는데 생각했다.
"나는 양을 그려본 적이 없어."
"그래도 상관없어. 양 한 마리만 그려줘."
나는 종이 한 장을 두고 끙끙거렸다. 손길이 가는 대로 그려서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벌써 몸이 병들었는걸. 다른 걸로 그려줘"
애써 그려준 그림을 거절당할 때마다 나는 점점 당황했다. '에라 모르겠다. ' 자포자기 심정으로 네모난 상자를 그려주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어."
상자 그림을 내밀자 어린 왕자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이거야, 이거. 내가 원한 건 바로 이거야"
그 아이는 상자 안에 양을 보았다.
나는 상자 밖 빈 공간만 보였다.
「어른은 설명서를 읽고, 아이는 상자 안을 상상한다.
어느 쪽이 더 가까이 있는 걸까, 진짜에」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어린 왕자'를 만났다. 육십 한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온 내가 그를.
어려서 미술시간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나이가 들어 세밀화, 수채화, 유화를 배웠지만 매번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는 사실만 자각했다. 그런 내가 그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일까? 어린 왕자는 내 그림을 보고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서 오래된 꿈 하나가 나에게 찾아와 살랑거리며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 무서워 보일지 몰라.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왕자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얼마나 오래 견디며 살아왔는지를. 어른이 된다는 건 때때로 마음을 감추는 일이었다. 감춘 채 살아온 세월이 때로는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잠시 내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 마음에서 온 걸지도 몰라. 당신이 숨겨둔 별빛 같은 꿈에서."
나는 울컥했다. 어린 왕자는 길을 잃은 나에게, 다시 길을 찾아주고 있었다. 내 마음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그는 나의 오래된 꿈이자, 친구였다.
그날 밤이 되자, 나는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떠 있는 별 중 하나에 어린 왕자가 있었다. 그와 함께 내가 그려준 양이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순간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별 하나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다.
그 별 이름은, '내가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