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재일조선인과 스이타사건』
니시무라 히데키 지음, 심아정·김정은·김수지·강민아 옮김, 논형, 2020
책의 제목만 보면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내용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부제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재일조선인과 스이타사건’이다. 스이타 사건은 어떤 사건일까? 개요는 이렇다. 1952년 6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 오사카대 도요나카 캠퍼스에서 한국전쟁 반전 집회가 있었다. 집회가 끝난 후 집회 참가자들은 당시 한국으로 보내지는 군수품의 수송로였던 스이타조차장에서의 열차 수송을 막기 위해 조차장으로 시위행진을 한다. 1천 명이 넘는 참가자들 중 다수가 재일조선인이었다. 참가자 중 100여 명이 기소되었다. 그 중 부덕수란 인물은 재일조선인 측 ‘주모자’로 기소되었다.
저자는 어떤 계기로 스이타 사건 연구모임(이하 연구모임)을 만들게 된다, 부덕수는 그가 자주 가던 한 꼬치구이집의 주인이었다. 부덕수는 모임의 참여자들이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해달라는 부탁에 ‘아직 말할 수 없다’며 거절하지만, 한 번 들어보는 건 괜찮겠다며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책의 내용은 연구모임의 여정을 따라간다. 스이타 사건 연구에서부터 시작해(1부)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의 맥락, 참전의 양상, 참전을 살아낸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2부), 마지막 부분에는 다시 스이타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3부) 끝맺는다.
부덕수의 ‘아직 말할 수 없다’는 거절은 1부에 나온다. 3부(연구모임이 꽤 진전된 후)에서 부덕수는 마음을 바꿔 자신의 생애와 함께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저자는 아직 말할 수 없다던 부덕수의 마음이 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스이타 사건의 핵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스이타 사건의 현재적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라고 묻는다.
과거사의 현재적 의미란 무엇일까. 한국전쟁 관련 활동을 하는 입장에서 어떤 민간인학살 사건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면, 아마 한국전쟁 때부터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국가폭력의 역사 정도의, 예상 가능한 답변을 할 것 같다. 저자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아직 말할 수 없는 마음’과 ‘이제 말할 수 있는 마음’ 사이에서 과연 무엇이 작동했을까. 그것이 과거사의 현재적 의미에 닿는 실마리라고 말한다. 책의 구성으로 미루어보자면, ‘아직’과 ‘이제’ 사이에는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 이야기가 놓여 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일본 정부는 한국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 후 어려움을 겪던 “일본경제의 ‘회생 약’”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을 통한 전쟁특수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이 책 역시 전쟁특수에 대해 말하긴 하지만 그 방점은 전쟁특수라는 참전을 살아낸, 전쟁특수라는 명명이 담지 못하는 참전을 살아낸 사람들에 찍혀 있다.
나카타니 사카타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전후 제1호 사상자’다. 원산 앞바다에서 소해(바다의 기뢰 제거 작업) 활동을 하다 기뢰 폭발에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참전 행위는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미군과 일본 정부는 사망 사실을 바깥으로 알리지 못하게 했다. 일본적십자 간호사들에게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동원을 위해 사용했던 ‘아카가미’라는 붉은색 소집영장이 날아들었다. 더 이상 전쟁에 동원되기는 싫다고 거부하는 간호사들에게 정부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말했다. 히라쓰카 시게하루는 한반도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가족들은 실종된 히라쓰카가 갑자기 전사했다고 연락을 받았다. 미군과 일본 정부는 히라쓰카가 ‘한 미군 병사의 권유로’ 밀항한 참전자라며 개인의 부정행위에는 어떠한 국가적인 보상이나 책임이 없다고 답했다. 한국전쟁 당시 공군의 출격 기지였던 일본의 곳곳의 기지에서는 추락사고가 빈번했다. 민가 100여 호가 전소한 곳도, 주민 17명이 한꺼번에 사망한 곳도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 일본의 피차별부락은 ‘개척단’이란 이름으로 만주로 이주당했다. 개척단의 많은 이들이 일본의 패전 이후 소련이나 중국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전투 중 사망했다. 포로가 된 이들이 다시 인민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종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포로였기에, 중국으로 송환되었다가 갖은 고생 끝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짧게나마 정리한 위 문단은 책에서 언급된 몇몇 ‘참전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한국전쟁에 붙는 국제전이라는 명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단순히 여러 나라가 참전했다고 국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국경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국적이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황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전쟁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땅에서도 어떤 이는 귀환하지 못한 친지를 기다렸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재일조선인은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남한에서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살았고1), 인민군으로 참전한 일본 국적의 사람은 우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여전히 기지 곁에서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정전협정 체결이란 전면전의 종식 이후, 즉 전후에도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끝없이 늘어선 전후의 삶 중 한 자리에 스이타 사건을 놓아둔다. 3부의 제목은 ‘스이타 사건의 해방’이다. 스이타 사건의 재판은 1972년 3월 17일에 마무리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1952년 6월부터 2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다. 기소의 핵심이었던 ‘소요죄’가 판결에서 인정되지 않음으로써, 재판은 어느 정도 승리했다고 평가된다. 그렇다고 그걸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판의 종결 이후 스이타 연구모임이 시작된 2000년 12월까지도 부덕수는 ‘아직 말할 수 없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이타 사건의 해방’이라는 말은 스이타 사건의 또다른 ‘주모자’로 기소되었던, 이미 사망한 미키 쇼고의 아들 미키 덴카이가 한 말이다. 덴카이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아버지 미키 쇼고의 생애를 연구 모임에서 절절히 풀어놓는다. 모임 이후 덴카이는 숙소에서 또 다른 ‘주모자’였던 부수와 함께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날 아침 일상으로 돌아가는 덴카이가 저자에게 한 말이 바로 ‘스이타 사건의 해방’이다. 여기서 해방이라는 말은 단순히 스이타 사건의 전말을 더 자세히 파악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보다는, 오래도록 속엣말로만 품고 있었던 아버지의 스이타 사건을 비로소 풀어놓을 수 있었다는 뜻에 더 가깝지 않을까.
3부에는 재일조선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김시종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김시종 역시 스이타 사건에 참여했었다는 말을 듣고 연구모임은 그에게도 강연을 요청한다. 김시종은 몇 번이나 고사하지만, 거듭된 요청 끝에 강연을 수락한다. 그는 강연에서 스이타 사건 참여의 동기가 되었던, “52년간의 침묵을 깨고” 그가 겪은 제주4.3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언젠가 어느 강연에서 과거청산에 ‘충분한’이라는 수식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화해나 치유라는 말로 과거의 사건을 쉽사리 봉합하려 하는 태도들이 있다. 이러한 태도들이야말로 과거사를 말 그대로의 ‘유물’처럼 묻어두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게 만든다. 스이타 사건 연구모임은 스이타 사건의 당사자들조차 다시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던 당시의 상황을 거듭해서 들춰내고, 권력자들이 쉬쉬하려 했던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서도 계속 파고든다. 사건을 계속 현재화하고 이야기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너무 끔찍했거나, 큰 상처였거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마침내 털어놓게 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묻는다. 스이타사건에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지. 저자는 스이타 사건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자신에겐 답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이 책은 해묵은 것을 해묵은 것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태도를 통해 독자들이 스이타 사건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건이라고 받아들이게 한다. 만약 과거사에 해방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들춰냄을 통해 과거사의 섣부른 종결을 계속 유예시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미처 녹여내지 못했지만, 이 책은 ‘반전'(스이타 사건부터가 반전 집회였다)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그 중에서 김시종이 전한 한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김시종은 한국전쟁 때 오사카에서 한국으로 보낼 군수품을 만들던 영세한 공장들에 폭탄의 제조를 그만두라고 설득하러 다녔다. 공장 사람들이 재일조선인이었기에, 동족을 죽이는 일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댄다. 실제로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군수품을 수송하던 열차를 10분 간 멈추면 1,000명의 동포를 살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경찰에게 검거되어 한국으로 송환된다면 거의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군수품 생산을 멈추라는 설득에 실패하면, 조선청년방위대가 출동해 무력행사를 실시했다. 그렇게 되면 공장 사람들은 “나는, 관둘래. 조선, 관둘래!”라고 외쳤다고 한다. 김시종은 이 소리가 지금까지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필사의 심정과 조선을 관두려는 심정 모두 재일조선인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비밀리에 전쟁 협력을 결정한 일본 지도부에서부터 항구에서 군수품을 나르던 노동자까지, 참전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수만 갈래 협력의 양상이 있었다. 협력을 결정한 마음이 제각기 다르듯, 그 마음을 설득하는 방식도 다 달라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참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이토록 다양한 참전과 반전, 재일의 결이 담겨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도 생생한 이야기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증언 속에서만 출몰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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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심아정, 「‘국민화’의 폭력을 거절하는 마음 : ‘난민화’의 메커니즘을 비추는 병역거부와 이행을 다시 생각하며」, 김기남 외, 『난민, 난민화되는 삶』, 갈무리, 2020에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