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난민화되는 삶》
《난민, 난민화되는 삶》
김기남, 김현미, 도미야마 이치로, 미류, 송다금, 신지영, 심아정, 이다은, 이용석, 이지은, 전솔비, 쭈야, 추영롱 공저, 심정명 번역, 갈무리, 2020
“왜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 옆에 서서 어느 위치에서 말해야 하는가이다. 전폭적으로, 그 어떤 판단도 없이!”(88p)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난민, 난민화되는 삶》의 이야기들이 더 깊이 와닿기 시작했다. 아마 활동의 일환으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도 해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왜 하느냐’란 질문이 치밀어 오르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어려워지기도 한다.
다르게 물으니 시야도 달라졌다. ‘왜 하느냐’란 질문이 스스로의 무력함을 향한다면, ‘누구 옆에 서서 어느 위치에서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타인 혹은 바깥의 무력함을 향한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사람을 목격할 때, 우선은 그에게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력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걸음을 내딛었다면,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다면, 그 순간부터 그와 나는 무관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무력함과 나의 무력함이 서로의 무력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난민, 난민화되는 삶》도 이 무관하지 않음을 감각한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2018년 6월,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직면한 건 ‘국민이 먼저다’, ‘가짜 난민’이라는 성난 구호였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청원에 서명했다. 혐오와 반대의 물결은 거셌다. 국가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그저 방관했다. 그럼에도 난민에게 다가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민Χ현장〉도 그들 중 하나였다. 활동가, 연구자, 예술가 등 제각기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묻기 시작했다. 난민과 우리가 무관하지 않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구 옆에 서서 어느 위치에서 말해야 할까?’
‘누구 옆’과 ‘어느 위치’를 감히 ‘곁’이라는 말로 바꿔본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곁’이라는 말이 전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곁’에 서기 위해선 먼저 사회 구조 속에 자리한 상대방의 위치와 나의 위치를 가늠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있는 위치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 어떤 난민도 다른 관계 속에 들어가면 ‘난민’이 아니”(33p)게 될 수 있으니까. 난민이 무엇인지 함부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난민에게 있어 ‘난민’이란 지위는 법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자격’인 동시에 사회적 ‘낙인’을 짊어지게 되는 이중성을 지닌 자리”(140p)이기 때문이다. 연대를 위해 섣불리 성소수자, 병역거부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의 삶을 ‘난민’이라는 이름을 가져와 ‘난민’화되는 삶이라고 동화시키기도 조심스럽다. 어쨌든 “무국적자인 ‘난민’과 국적을 지닌 ‘우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니까.
이처럼 ‘곁’에 서려는 시도는 여러 질문, 고민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뤄져야 한다. 〈난민Χ현장〉의 구성원들이 난민과의 관계를 ‘우리’라고 섣불리 단정짓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민Χ현장〉은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곁’에 서기 위한 치열한 시도를 이어갔다. 〈난민Χ현장〉이라는 모임의 이름이 말해주듯, 한국사회의 여러 현장-병역거부, 일본군 ‘위안부’, 이주노동자, 차별금지법, 동물권 등-의 이야기를 난민의 현장과 연결시켜 보려고 했다. 그렇게 《난민, 난민화되는 삶》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 목소리들이 함께 말해지고 들려지는 자리에서 연결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가능성이었을까. 먼저, 난민을 비롯한 여성, 성소수자 등의 소수자를 바깥으로 내모는 “권력에 대한 비판”(12p)을 통해 가능해지는 연결이다. 지난 5월,〈그런 난민, 병역거부자, 트랜스젠더는 없다〉주1라는 토크쇼가 열렸다. 토크쇼의 제목은 말 그대로 난민, 병역거부자, 트랜스젠더를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심사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선언이었다.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는 양 심사하는 권력 앞에서,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는 말 그대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성소수자 난민은 심사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한 성 경험을 심사관에게 드러내야 했으며, 어떤 성소수자 병역거부자는 자신의 병역거부 사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국가를 떠나 망명을 선택했다.
또한 진짜-가짜를 나누는 권력의 기준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로 작용하면서, 소위 ‘내부자’로 간주되는 사람조차 가짜로 “‘오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165p)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계 밖의 사람들과 더욱 선을 그을 때, 권력이 그어놓은 경계는 더욱 강화된다. 안 그래도 협소한 자리에 있는 병역거부자나 난민에게는 더더욱 자신이 병역기피자가 아님을, 난민법을 이용하려는 ‘경제 난민’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이중으로 부과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심사가 더 가혹한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심사라는 제도, 누군가의 존재를 함부로 인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권력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이러한 저항과 비판을 통해 성소수자와 난민, 병역거부자는 함께 연결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직접 심사의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언제나 자기증명의 책임을 각자에게 떠넘기는 권력에 대해 함께 저항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다른 연결은 가능성은 “들으려는 노력”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난민에 대해서, 성소수자, 병역거부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적극적으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개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기실 소수자 개개인의 이야기는 사회에서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 들리더라도 어떤 ‘~다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멘 난민은 치안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뺏는다’는 근거없는 혐오발언들이 넘쳐나고, 또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내 곁에 성소수자가 있는 건 싫다’는 식의 혐오가 공기처럼 떠다닐 때, 소수자들은 쉽사리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소수자의 말하기는 “나/우리는 그런 사람 아니”라는 “해명”(322p)으로 축소된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들 또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를 개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난민’, ‘성소수자’, ‘장애인’라는 정체성의 필터로 걸러 듣거나, 그들이 겪은 피해나 어려움처럼 듣고 싶은 것만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미류는 “사람은 정체성의 조합”(323p)이 아니며, “모두가 ‘나’로서 말할 수 없다면 누구도 ‘우리’에 대해 말할 수 없.”(324p)다고 지적하면서, 소수자들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해주며,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안전한 공간”주2(323p)을 요청한다.
공간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도 필요하다. 이지은은 한국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최초의 증언이라고 기억되는 김학순 이전에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린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증언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94p)이라고 짚는다. 실제 윤정옥은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전,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고, 공론화하면서 “‘들을 준비’에 나섰”(92p)다. 이지은은 이러한 “‘들으려는’ 노력”을 “노래를 ‘들리게’ 한다는 점에서 ‘함께 부르기’”라고 해도 좋겠다”(134p)고 하며, ‘듣는 자’의 자리를 ‘말하는 자’의 자리까지 확장시킨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실은 함께 말하고 있다는 인식은, 듣는 사람도 “또 하나의 ‘증언자’”(396p)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수자의 ‘말하기’는 그 자체만으로 소수자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커밍아웃을 하는 이들이 청자의 변화를 부추기며 일종의 ~되기becoming에 의해 함께 위험에 노출되는 ‘비커밍아웃’을 요청한다고 강조”(396p)하는데, 이는 증언을 듣는 사람의 자리가 “안온하고 위계화된 시민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청자 스스로의 비커밍아웃을 촉구하는 장, 즉 또 하나의 증언자로 변화하는 장임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는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인식’을 통한 연결의 가능성이다. 전쟁없는세상의 활동가 쭈야는 〈전쟁 만드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겠습니까?〉란 제목의 글을 통해 예멘 내전에 한국산 무기가 사용되고 있음을 밝히면서, 예멘 내전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던 한국사회가 사실 전쟁에 가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일본 내부인으로서 ‘반일’을 내세우며 일제 전범기업을 폭파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들의 ‘반일’ 투쟁은 당시 유지되고 있던 일본사회의 일상이 과거 일제의 가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가해 인식에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도미야마 이치로 또한 “죽임당하지 않는 것이 죽임당하는 것을 타자 혹은 적으로 잘라내고 죽이는 것에 다가붙음으로써 성립하는 사회”(453p)를 말한다. 이 사회에서 죽임당하지 않는 이들은 죽임당하는 이들의 죽음이 ‘OO니까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스스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자신은 ‘OO’가 아니라는 몸짓을 통해 죽임당하는 이의 자리에서 빠져나온다. 바로 이러한 “OO가 아니라는 몸짓이 중첩되면서 사회를 구성해 나간다.” 물론 여기에는 “오인되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453p) 자리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죽임당하지 않는(내부에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 역시 살해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놓여 있기에, 죽임당하는 사람과 함께 그 공포를 부여하는 권력에 대해 저항함으로써 연결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연루’의 감각이다. 꼭 적극적으로 내-외부를 구분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그저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배제하는 경계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그 감각. 이러한 연루의 감각을 놓지 않고 조금씩 더 넓혀가는 것 또한 연결을 통해 함께 권력에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이상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한 연결의 가능성은 내가 책을 읽어나가며 나름대로 정리한 것일 뿐,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한 연결의 가능성이 이 책에 담겨 있다는 것을 언급해둔다. 책을 읽다가 이미 읽었던 부분을 들춰보는 일이 많았다. 하나의 질문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고, 지나쳤던 질문을 다시 묻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치 골목이 다른 골목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때로 이미 지나친 골목을 다시 걸으며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걸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여정이 된다.
아마 책을 읽는 각각의 독자들은 서로 다른 여정을 통해 이 책을 통과해나갈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골목을 걸어가다 저기 멀리 보이는 골목으로 지나가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 혹은 서로 다른 골목에서 같은 골목으로 들어왔다 다시 다른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일, 이러한 마주침이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마치 동지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일이 되어서, 저 멀리로 손을 흔들어주거나 자연스레 함께 걷는 상대방과의 보폭을 맞춰서 걸어가게 되는, 그런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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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난민인권센터,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전쟁업는세상이 2020년 5월에 진행한 토크쇼.
영상 주소 : https://youtu.be/NIuPDm99zsc
주2 난민인권센터에서 활동하는 달팽이는 난민들의 “안전한 장소를 위한 구성요소”로 다음을 언급한다.
익명성(필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난민다움 등 ~다움이 없는, 난민과 비난민을 구분하지 않는, 비계획, 비의무, 자발적, 상시적, 경험의 공유, 위로-즐거움 또는 유익함, 존중의 관계, 듣고-말하기, 번역-언어적 제약이 없는(이는 훌륭한 번역 또는 통역으로 국한된 이야기는 아님), 접근의 제약이 없는, 필요할 땐 서로 힘을 합쳐 볼 수도?, 모였다 흩어지는, 흩어졌다 모이는, 서로 의존, 실패와 갈등이 있는 공간 (6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