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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Feb 12. 2024

“엄마가 취업해도 될까?”

나이 마흔에 얻은 취업의 기회

나는 프리랜서 통역사이다. 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통역사를 인하우스 통역사라고 하고, 나처럼 한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아주 프리(?)하게 일을 하면 프리랜서 통역사라고 불린다. 나는 대학원 졸업 후 동기 소개로 L사의 통역을 하게 되었다. 인하우스는 아니고 L사에게 통역 업무를 의뢰받으면 나처럼 프리랜서 통역사를 수배하여 통역 업무를 할당하는 에이젼시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졸업 후 약 10년 넘게 에이젼시에게 업무를 의뢰받아 L사와 가끔 N사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기업에서 일하면서 이상하게도 결혼 생각이 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결혼을 하면 회사에 오래 다니지 못할 거야.’ ‘아이는 내 손으로 키워야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회사는 그만둬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잘하는 일 중, 내가 좋아하는 일.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일 중 내가 잘하는 일.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내가 통역을 잘하고 즐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결혼 후 나는 당연히 회사를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 또는 전문직이 될 거라고 꿈꾸었다.


내가 왜 결혼하면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그 당시에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딱히 모르겠다. 다니던 회사가 결혼 후 육아를 하며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우리 엄마가 일을 하지 않고 늘 집에서 우리를 챙겨줬던 것이 좋아서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정확한 대답을 못하겠다. 그냥 어렴풋이 결혼하면 회사는 그만둬야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안일하게 그게 전업주부를 꿈꾸었는지, 프리랜서를 꿈꾸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덕분에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통역사라는 직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2년 터울의 남매를 낳고 기르며 잠깐의 공백은 있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또는 이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매우 불규칙하게나마 들어오는 일을 가늘고 길게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지금의 L사의 통역을 이어나간 지 10년이 넘었다. 사실 중간에도 L사 외에 크고 작은 통역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단발적인 일이다 보니 내 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통역사로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할 정도의 업무 강도와 시간을 할애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지금의 나의 삶의 균형을 봤을 때 아주 최적의 일, 최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코로나 덕분에 원래는 회사에 출근을 해서 대면 통역을 하던 것이, 코로나가 터지면서 재택근무가 일반화되자 집에서 줌으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보통 에이젼시에서 며칠 전에 연락이 온다. “통역사님, 9일 오후 3시-4시 회의 가능하세요” 그러면 나는 일정을 보고 가능 여부를 알려주면 회의가 픽스된다. 그러나 가끔 긴급건으로 “오늘 오후 5시-6시 회의 가능하세요?”라고 연락이 오기도 한다. 어떤 날은 하루에 3건을 하기도 하고, 어떤 달에는 2-3건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수입은 둘쑥날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통역사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이 일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학원을 가거나 혼자 할 일을 하다 보니, 집에서 통역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통역이 가능한 횟수가 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젼시에서 연락이 왔다.


통역사님, 혹시 풀타임 계약직으로 근무 가능하세요?


사실 이 에이젼시와 일을 하는 통역사는 두 가지 계약형태가 있다. 하나는 나처럼 단발적으로 회의가 들어올 때마다 일을 하는 프리랜서 통역사. 그리고 또 하나는 에이젼시와 한 달 단위로 계약을 하고,  한 달에 총 몇 건의 통역을 한 후 월급으로 받는 풀타임 계약직이다. 그러면 하루에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고 평균 3-4건의 회의를 한 후 한 달에 월급을 받는 형태이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고정적으로 매일 회의에 투입되어야 하는 대신, 둘쑥날쑥하지 않은 아주 아름다운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내 동기 중에는 이와 같은 풀타임 계약직으로 일을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내부 사정을 잘 안다. 지금까지도 몇 번, 이 풀타임 계약직을 뽑는 공고가 있었지만 나는 지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아이들도 어렸고, 통역 외에 이것저것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직접 나에게 풀타임 계약직 제안을 해오니 갑자기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집에서, 그것도 편안한 차림으로 방 안에서 일을 한다는 것. 그것만큼 매력적인 조건이 없다. 차비도 들지 않고 밥값도 들지 않고 품위유지비도 필요 없다. 심지어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일을 할 수 있다. 이제 아이들도 컸고 다른 일들도 마무리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왠지 이제는 일을 해도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안의 재정상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고 혼자 하루동안 고민을 한 후 먼저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오! 좋은 제안이네! 해도 되지 않을까?


남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나는 가슴이 더 떨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평소에 그렇다고 다른 에이젼시에 이력서도 쓰지도 않으면서 어쩌면 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는 나도 경제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남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도 고민되는 포인트가 생겼다. 하나는 갑작스러운 빨래방 대응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불규칙하게 손님 대응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이들 걱정이었다. 올해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까 손이 갈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또한 함께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조금 걱정되었다. 같이 신문 하브루타도 하고 명심보감 필사도 하고 책도 읽고 가끔은 보드게임도 하는 시간들. 사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고민되는 부분을 이야기하니, 빨래방 대응은 자기도 같이 하면 커버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아이들은 이제 다 컸으니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을 했다. 남편의 말을 들으니 왠지 나도 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설레었다.


그 다음날 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엄마가 지금 집에서 가끔 회의하는 것처럼, 앞으로 혹시 매일 10시부터 6시까지 회의를 해도 될까? 엄마도 집으로 출근하는 워킹맘이 되는 거지~


나는 아이들이 나에게 일을 하라고 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보통 그 나이가 되면 엄마가 출근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바라기도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회사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일하는 거니까. 지금처럼 하는 거니까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아니, 엄마 일 하지 마.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엄마 일하면 지금처럼 놀지도 못하고 웃지도 않을 거잖아요.


남편이랑 나는 의아하나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당연히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곧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들이 심하게 반대를 한다. 남편은 웃으면서,


너네는 아직 엄마가 필요하구나~ 너네가 다 커서 엄마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


네, 지금도 엄마는 바쁜데 일하면 더 바빠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엄마랑 더 있을 시간이 없어지잖아요. 그거는 싫어요. 지금도 엄마는 바쁜데…


나는 몰랐다. 내가 하는 일들이 다 집에서 하는 일 (물론 빨래방은 정기적으로 출근을 해야 하지만)이라 집에서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자료 만들고 통역을 해 왔는데, 그런 내가 엄청 바쁜 엄마로 비춰있었다니. 그리고 함께 하는 시간이 지금도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어쩌면 몸만 집에 있었을 뿐, 영혼은 집 밖에서 늘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했다. 그 말을 듣고 최근 몇 달을 돌이켜보니, 그림책을 만든다고 나는 늘 영혼이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다. 예술가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는 내가 갑자기 창작의 고통을 겪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예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부동산 일을 한다던지, 통역을 한다던지 하면서 나의 멘탈은 어쩌면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말을 듣고 정말 미안했다. 나는 그저 집에서 일을 하니까,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주니까, 필요한 것을 사 주니까…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늘 정신없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에이젼시에는 거절의 메시지를 보냈다. 남편은 나중에 나에게 너무나 아까운 제안이었다며 속내를 내비쳤다. 사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했던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내가 더 속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나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들과 마음으로 나누는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다음 날 나는 행동으로 옮겼다. 늘 영화를 보고 싶다던 아이들. 나는 늘 갑자기 회의가 생기는 일이 허다해서 미리 예매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사실 귀찮기도 해서 영화 보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회의가 다음 날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예매했다. 이렇게 시간을 일부러 내서 아이들과 놀러 나가는 일이 얼마만의 일이지? 정말 오랜만에 셋이 데이트를 하러 나가니 아이들도 정말 들떠있었다. 사실 누구보다도 내가 더 들떠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이번에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과연 나는 언제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왠지 평생 없는 것은 아닐까?) 물론 속은 쓰렸지만 잠시나마 좋은 기회가 와서 잠깐 내 마음이 설렐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더 나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바쁜 나의 일은 조금 뒤로 미루어 두고 조금 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


언젠가 아이들이 "엄마, 일 해도 되요!"라고 말 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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