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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Nov 04. 2024

“최종 학력 증명서를 떼 오세요.”

나이 마흔에 시작하는 새로운 큰 그림


최종 학력 증명서를 떼 오세요.

 너무나 오랜만에 들은 단어였다. 그건 어디서 떼는 거지?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생겼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동기 중 한 명에게 카톡을 보냈다.

“있잖아, 최종 학력 증명서 떼려면 학교에 다시 가야 하는 거 아니지? 어디서 떼면 되는지, 알아? “

 그나마 지금도 일을 하고 있고 최근에 이직을 한 동기였기에 당연히 아는 줄 알고 물었다. 하지만 동기는 자신도 잘 모르지만, 아마 학교 사이트에서 할 수 있지 않냐며 연락이 왔다. 나는 고맙다고 하고 다시 초록창을 켜고 검색을 했다. 검색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 나이에 최종 학력 증명서를 떼 보다니…‘


그렇다. 나는 20대 후반에 대학원을 졸업한 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졸업 증명서와 같은 것을 떼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직업 특성상, 거의 소개로 일을 하기 때문에 나의 학력을 증명할 일이 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거의 10년 넘게 경제활동을 하고는 있었지만, 증명서를 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에 나는 내가 하던 일이 아니라(물론 예전에 잠시 했었지만) 다른 업종의 일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남들이 보기에는 내가 하는 일이 많아서 엄청 바빠 보일지 몰라도, 중간중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엄마의 손길을 덜 필요하게 되었다. 남들이 보면 아이들이 학원 가느라 바빠서 그럴 것이라 생각이 들겠지만 정 반대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니던 학원들도 하나씩 그만두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문제는(?) 아이들이 하루 종일 나가서 놀다가 저녁 7시 반에야 들어온다. 나는 보통 저녁을 6시에 먹기에 혼자 집에서 간단히 먹은 후, 아이들이 들어오는 7시 반에 간단히 내어주고 나는 육퇴를 한다. 설거지까지 아이들이 하다 보니 저녁 시간이 점점 더 여유로워졌다. 그러면서 집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났다.


 둘째,

나의 본업이 점점 줄고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환경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에는 아직은 젊은 나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내 본업과 관련된 일을 더 해볼까 했지만, 그러려면 거의 정사원처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서 포기했다. 나는 본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간혹 일을 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에 묶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비는 시간들이 늘면서 나는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얼마 전에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더 절실하게 느꼈다. 오롯이 내가 번 돈으로 다녀온 유럽여행. 남편도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생색 내기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내가 번 돈으로 여행을 가야겠다. 그러려면 경제 활동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내가 젤 잘할 수 있으면서 짧은 시간 동안 일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일본어 강사였다. 집에서 그나마 버스 한 번에 가는 강남역으로 검색을 해 보니, 몇 군데 일본어 학원이 나왔다. 일단 그중에서 3군데 정도 이력서를 넣었다. 다행히 3군데 모두에서 면접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이 마흔에 이렇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는 곳이 있어서 정말 감사했다. 사실 일반 기업이었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원은 나이가 많아도 경력만 된다면 되는 곳들이 종종 있나 보다.

 3군데 중 한 군데는 면접에 강의 시연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 이게 얼마만의 강의시연인가. 사실 나는 대학생 시절 1년 휴학 후 일본에 있는 일본어 교육 과정을 공부했었다. 사실 그때도 내가 일본어 강사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공부를 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 3년을 다니면서 잠시 쉬고도 싶었고, 한번 부모님 품에서 떠나 독립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떠난 도피 유학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같이 공부했던 언니들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모두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나만 통역일을 했었는데, 돌고 돌아 나도 다시 일본어 강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되돌아보니, 과거했던 일들이 언젠가는 써먹을 데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일본어 교육 과정 시 실습 모습

 3군데 면접 중 모든 학원에서 하는 말이 비슷했다. 우선 통역일에 비하면 페이가 무척 적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물론 괜찮다고 했다.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큰돈을 벌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통역일과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면서 수업을 늘려 나가라는 조언이었다. 이것도 오케이다. 오히려 좋았다. 나는 시간에 묶이는 것보다 조금 벌더라도 자유를 택하고 싶었다.


 3군데 모두 나와 일하기를 희망했지만, 그중에서 제일 먼저 일을 주겠다고 한 곳과 일을 하기로 했다. 물론 학원을 나간다고 다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학원은 보통 오후에 시작해서 저녁까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저녁 시간에 집을 비우는 일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히 저녁 수업을 1주일에 2번 정도만 해도 된다. 그날만큼은 남편이 일찍 오거나 가까운 친정 엄마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아직도 친정 엄마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취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면서 내 마음에 걸린 것은 딱 하나다.

두 번째 그림책은 언제 내지...?

 그림 그릴 시간은 있을까? 초반에는 이 생각에 마음 한 구석에 큰 돌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마음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만히 집에만 앉아 있는다고 떠오를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예술가는 항상 궁핍해야 하고 몸이 불편해야 한다. 결핍이 있어야 더욱 절실해진다. 요즘 나에게는 그림책에 대한 '절실함'이 희미해졌다. 나의 버킷 리스트였던 그림책 출판을 이루어냈고 물론 다음 그림책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욕심'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내가 첫 번째 그림책을 낼 때는 절심함이 있었다. 그때는 반드시 그림책을 낼 수밖에 없었던, 나의 열정 그리고 환경이 있었다. 다시 한번 그 절실함으로 무장하기 위해, 나는 '결핍'이라는 환경에 나를 던지려고 한다.


 시간이 한없이 부족하다. 강의를 듣는 대상이 세 부류다 보니까, 세 부류 모두 다른 강의안으로 진행해야 한다. 안 하던 일을 하려니 더더욱 손에 익지 않고 더디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나에게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절실해진다. 악착같이 5분이라도 짬을 내서 그리려 한다. 그래, 잘 된 거야. 하루 종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난 후,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누군가를 이끌고 가르치는 일이 즐거운 나는, 오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 일터로 향한다. 나이 마흔에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음에 감사하며. 그리고 내년에 또 가족여행을 갈 꿈을 꾸며. 그리고 이러다가 언젠가 나의 그림책 영감님이 불쑥 나타나주길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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