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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Dec 09. 2021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인가, 일본인인가?

“야, 조센징(조선인)이다! 조센징!”   


 저 멀리서 일본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늘도 눈치를 보고 놀이터에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나 나나 다를 것이 없는 외모인데 내가 한국말을 쓰는 것을 들은 일본 친구들이 나를 조선인이라고 놀리며 자기들끼리 킥킥댔다. 그 당시 나는 자국에 대한 개념도 없었기에 왜 놀리는지도 몰랐고 그냥 외국인이라서 놀렸다고만 생각했다. 1986년 아버지가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서 우리 가족은 모두 일본으로 떠났다. 그 당시 엄마는 아이우에오도 모르고 일본으로 갔다. 지금은 한류 덕분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에서 낯설지 않지만 내가 일본으로 간 그 당시에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후진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2살짜리 딸, 그리고 뱃속에 또 하나의 생명을 품고 일본으로 넘어간 엄마, 그리고 주말도 반납하고 매일 같이 일했던 아버지.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부모가 되고 나서야 부모님의 삶이 그려진다. 일본으로 갔던 1980년대 후반,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이제 막 글로벌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일본의 가전제품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주말도 없이 매일 회사에 나가 일본 시장을 개척하는데 고군분투하셨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들었다. 2살에 일본으로 넘어가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어린 나는 그 속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동네 놀이터에 나가서 놀고 있으면 일본 친구들이 와서 조선인이라며 놀리고 가던 모습이었다. 사실 모든 일본인이 우리를 놀린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일본 유치원을 다닌 후 한국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유치원은 다행히 교회 유치원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본말이 서툰 나와 엄마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유치원 시절의 기억은 매우 따뜻하다. 사진 속 나는 늘 선생님 옆에 붙어 있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그 후 대학생 때 일본에서 그 친구들과 만났을 정도로 서로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이다. 그 후 한국인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나는 처음으로 한글이라는 것을 배웠다. 교과 과정은 일본인 아이들이 배우는 과목을 그대로 배우되 주재원 친구들을 위해서 1주일에 3, 4번 한국어 수업을 따로 받았다. 한국인 학교라고 해도 재일교포 친구들이 대부분이고 나처럼 주재원 자녀들이 소수였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 주재원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다닌다는데, 그 점에 대해서 늘 아버지는 아쉬워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일본어로 대화하였고 하교 후 발레, 피아노, 서예 등 학원을 가도 일본어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어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 부모님은 나에게 한국말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일본어로 말했다. 그만큼 일본어가 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긴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말이었다. 일본으로 가기 전, 나의 이모가 사는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이 대치동에 아파트를 하나 사놓고 가셨는데, 우리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 대치동은 거의 다 논밭이었다고 한다. 모두 갈아엎어서 지금의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탈바꿈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대치동이 어떤 곳인 줄도 모르고 우리의 첫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늘 새로 온 친구야. 자 인사해.”

“일본인이야?”

“선생님~ 일본어 좀 해보라고 해봐요!”

“일본어로 노래해봐!”


 처음 5학년 교실에 들어간 나는 맨 앞에 나가서 인사를 했다. 빼곡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짜고짜 일본어로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어떤 노래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 앞에서 그것도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하자마자 일본어로 노래를 불렀다. 그 후부터 나는 아이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순진했다. 옆 반 친구들도 우리 반에 와서 ‘전학 온 일본 얘 어디 있어?’ ‘야 일본어 해봐.’라며 말을 걸어오는 일이 많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딜 가나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구나.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더니 나의 모국에 돌아오니 일본에서 왔고 한국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일본인 취급을 받는구나 싶어서 어린 나이에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디에서 살아야 환영받는 존재일까?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둥둥 떠 있는 구름과 같은 마음으로 생활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같은 반 친구들은 나에게 한국 아이들은 기가 세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를 해주었다. 친구들의 조언 때문이었는지 나는 같은 반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오면 두려웠다. 그래서 늘 혼자였다. 그러다 집 앞 보습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처럼 한국말이 서툰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그 친구들도 나처럼 주재원으로 미국과 호주에서 살았던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분명 나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주민등록상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가 조금 서툴다는 이유로, 또는 어렸을 적 외국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나를 외국인 대하듯이 대했다. 나는 그 시선 때문에 상처 받았다. ‘일본인 아니야?’ ‘한국말이 왜 이렇게 이상해?’라고 묻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한창 자아가 형성되어야 할 나이에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자란 나는, 또래 친구들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만 왜 이럴까?’라고 자책을 했고 심지어 아버지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나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한국어가 능수능란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친구들의 시선이 바뀌기까지. 지금은 그때보다 글로벌 사회가 되었고 또한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다. 외국에 사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아마 지금 내가 일본에 가서 산다면 한류 덕에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낼 것이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고 해서 외국인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었다. 그 당시 어린 나는 자아의 혼란을 겪어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러한 고민을 거듭했기에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갖고 자랄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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