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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Feb 27. 2023

삐- 삐- 삐- 경고등이 울리면

내 이름 석자 찾기

(실제 이름은 초성으로만 달았음)


"남개미님~"

"엄마!

"ㅈㅇ이 엄마~"

"ㅇㅇ이 엄마~"

"여보~"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그녀의 가짜 이름들. 그렇게 불리다 보면 그녀는 그녀의 진짜 이름을 잊곤 한다.

'내 이름이 뭐였지...?'

 특히나 2달이나 되는 겨울 방학을 아이들과 보내다 보면 점점 그녀는 자신이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아이들이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면서 손이 덜 가는 것은 사실이다. 겨울방학의 강도도 1년 1년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클수록 또 다른 차원으로 아이들을 챙겨줘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 24시간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보내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는 이유 없이 몸에 힘이 빠지고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뭘 해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있지 않다. 매일 해야 할 루틴은 빠짐없이 하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고장 난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조금 우울하다가 점차 온몸을 먹구름이 덮어 버린다. 그땐 경고등이 뜬다.


"ㄴㅂㄹ이 없어졌음. ㄴㅂㄹ이 없어졌음. 시급히 ㄴㅂㄹ을 찾으시오. 삐삐삐"


 그렇다, 한계점에 다다른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점은 이러한 우울감을 가족도 못 느낀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이 힘든 점을 티 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걸 아는 그녀는 경고등이 들여옴과 동시에 바로 가족들에게 알린다.


 "나, 이번 주말 저녁 이틀 다 나갔다 올게."


 그녀의 남편과 가족은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힘없는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짓는다. 10년 동안 그녀를 봐온 그녀의 남편은,

"그래 당신도 밤공기 쐬고 와야지. 술도 마시고 실컷 놀다 와."


 오랜 학습에 의해 단련된 남편의 대처는 아주 훌륭했다. 때 마침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와 또 한 명의 베프를 만나러 금요일 밤 9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잠실까지 운전해서 가는데 저 멀리 롯데타워가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이 난다. 그녀는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롯데타워가 너무 눈이 부셔서일까? 아니면 그녀 빼고 지나가는 차, 사람들이 너무 눈이 부셔서일까? 살짝 눈물을 훔치고 24시간 하는 카페에 도착했다.


 밤 10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카페 앞 주차장은 만차였고 아니나 다를까 카페 안에도 만석이어서 몇몇 커플들은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10시만 되면 아이들과 책 읽고 뒹굴뒹굴하다가 잠자는 시간인데... 이렇게 젊은이들은 10시에 커플끼리 또는 친구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오랜만에 깨달았다.  

'나도 20대 때는 저렇게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이내 그녀의 친구 2명이 들어오면서 마침 자리도 나서 자리를 잡고 커피와 빵을 시켰다.


 그녀와 친구들 수다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신기한 것은 그 시간에도 그 카페는 만석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일찍 자는 버릇 때문인지 12시부터 연신 하품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졸린 그녀와는 달리 신나게 수다 떠느라 바빴다. 그녀와 친구들의 대화는 늘 똑같다. 두 친구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어린이집 이야기, 베이비 시터 이야기, 학원 이야기 등등. 그녀는 이미 먼 옛날 일을 회상하듯, 친구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친구들이,

"ㅂㄹ아, 넌 어땠어?"

라며 이름을 불러주기라도 하면 잠이 확 깼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맞다, 내 이름이 ㄴㅂㄹ이었지...'


 다음 날 다시 그녀는 저녁 7시에 집을 나섰다. 전날 1시까지 수다를 떨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교대 역으로 나섰다. 둘째 날이라 그런지 첫째 날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교대역 근처의 유흥가를 처음 본 것이었다. 지금 집에 이사 오면서 교대역이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저녁 시간대의 교대역을 처음 가본 것이었다. 평일엔 더 북쩍거린다는 친구의 말에, 주말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만난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직장인이다. 그녀의 별명을 만들어준 장본인들로, 사실 가장 서슴없는 사이이다. 고등학교 때 만나 공부한답시고 도서관 가자고 만나서 노래방가던 친구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실연이라도 당하면 밤늦게까지 놀이터에서 이야기 들어주던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들만 만나면 사실 평소에 아주 고상한 척하던 그녀도 그녀의 입에서 살짝 비속어들이 나온다.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이 꼭 오늘은 곱창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겨우겨우 찾아낸 곱창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친구 두 명은 앉자마자 바로 소주를 깠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곱창이라며, 아주 큰소리로 감탄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게는 10평 남짓한 가게로 그녀와 친구들 외에도 3 테이블 정도 손님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왜냐하면 그녀와 친구들이 입을 다문 10초의 침묵이라도 생기면 가게 안이 쥐 죽은 듯이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대화는 옛날 서로의 흑역사를 안주 삼아 까르르 웃기 시작하더니 또 39금 토크로 이어간다. 그러면서 또 동창 중 한 명을 안주삼아 웃어댄다.

"애, 개미야. 넌 술 안 먹고 왜 이래 진짜."

"쟤 왜 저래..."

 그녀는 술을 먹지 않고서도 각 1병의 소주를 마신 그녀들에게 저런 쿠사리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이 시간이 너무나 그리웠나 보다. 완벽한 척하지 않아도, 부족한 척하지 않아도, 잘난 척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너무나 이상한 아이, ㄴㅂㄹ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2시간 동안 곱창을 먹었더니 셋다 입을 닦아도 닦아도 기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며 다시는 곱창을 먹지 말자고 헤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진 후 다시 2차 수다가 카톡방에서 시작되면서, 곱창 맛집을 누가 공유했다. 다음에는 여기 가자며... 이해할 수 없는 그녀들의 세계. 그녀는 집에 가면서 피식 웃었다.


 밤 10시 넘어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와서도,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도 카톡방은 불이 났다. 사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만나면 그녀의 마음이 가장 편안한 친구들이다. 물론 그녀의 취미, 예를 들어 그림 그리는 일 또는 그림책 만드는 일 등은 공유하기 어렵다. 왜 그림을 그리는지, 왜 그렇게 투자를 하는지 등 이해를 못 하는 친구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또 그녀와 결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정기적으로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 그녀의 친구들에게 욕(?)도 시원하게 먹고 그녀들과 음담패설을 해야 마음의 병이 없어지나 보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자마자 아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어제 즐거웠어요? 술 많이 마셨어요?"

 그녀는 아들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응, 엄마 너무너무 즐거웠어. 다음에 맛있는 곱창집 같이 가자."


 그렇게 그녀는 다시 ㄴㅂㄹ이 아닌 엄마, 아내의 자리로 돌아왔다. 나갔다 와보니 깨달은 것이 있다. 집이 정말 따뜻하다는 것을. 다시 이 따뜻한 집에서 잘 지내다가 삐- 삐- 삐- 경고등이 울리면 그때 다시 ㄴㅂㄹ이라는 이름 찾아 나가면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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