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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emi Aug 14. 2023

코로나 후 아이들의 첫 여름 캠프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

“신부님~ 왜 1인실이나 2인실이 아니에요?”


코로나가 풀리면서 우리 성당에서는 양주에 있는 수련회장에 2박 3일 동안 캠프를 떠나면서 아이들이 처음 했던 말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55명의 아이들은 가족이 아닌 친구, 선생님과 함께 여행을 간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코로나 기간 동안 이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가족들과 단란하게 풀빌라만 다니던 아이들이 오래된 통나무로 만들어진 대형 수련회장은 태어나서 처음 봤을 것이다. 심지어 방마다 7~명씩 옹기종기 모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벌레가 너무 많아요~”

“이상한 냄새가 나요~”

“왜 이렇게 좁아요~”


방마다 아이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나름 숲세권이라 불리는 곳에서 사는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버는 벌과 나방들을 보며 무서워서 방에도 못 들어간다고 했다. 어떤 아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와 같은 방이 되었다고 울면서 나온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조금 안타까웠다. 조금은 불편한 상황 등이 아이들에게 분명 성장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될 텐데, 지금까지 그러한 기회를 아이들에게 주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불만을 터트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공감해 주며,

“야, 너네 이틀만 지나 봐~ 괜찮아질 거야~ 안 죽어 안 죽어!”

라고 토닥여주었다.

첫날은 외부에서 선생님들 불러 아이들과 빡쌘(?) 게임의 시간을 보냈다. 대강당에 모여서 손피구, 줄다리기, 빙고, 판뒤집기 등 쉴 새 없이 아이들은 조를 짜서 게임에 임했다.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던 아이들. 그러나 조를 짜서 함께 협동하며 승패를 가르니 서로 끈끈한 우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이런 시간이 있겠지만, 나이가 다른 오빠 언니 동생들과 이렇게 협동할 일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집에서는 막내였던 오빠 언니들도 이곳에서는 동생들의 머리도 빗어주고 라면 물도 따라주며 리더십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외동인 아이들은 혼자서 생활하다가, 이곳에 와서 다른 친구들과 2박 3일을 먹고 놀고 자며 배려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켜 주는 시간이었다.

이번 캠프의 콘셉트는 주님 안에서 신나게 노는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이라고 해도 다들 학원 다니느라 바쁘다. 우리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방학 때는 할머니 집에 오래 머물며 사촌들이랑 놀았다. 그리고 동네 놀이터나 개울가에서 하루 종일 놀거나 했다.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만화책을 보고 아침 늦게까지 늦잠 자는 것이 방학이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방학이 사실 더 바쁘다.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하거나 다음 학기 예습을 하느라 매일 같이 학원을 돌고 돈다. 그래서 2박 3일 캠프 기간 동안만큼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자고 싶지 않으면 재우지 않기로 신부님이 선언했다. 신난 아이들은 밤 12시에 선선한 산에서 부는 바람을 만끽하며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고 배드민턴을 했다. 그리고 새벽 2시에 라면을 먹고 또 수다 떨고 게임을 하며 4시에 잔 친구들이 허다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놀면 다음 날 어떻게 놀지?라고 걱정한 선생님들을 비웃듯, 아이들은 오전 7시 30분에 땡 하고 일어난 후 아침을 먹고는 다시 수영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피곤함은 선생님들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아침 10시부터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까지 수영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행복할까? 매일 공부하라고 하는 엄마의 잔소리도 없고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할 학원도 없다. 심지어 아이들이 평소에 못 먹는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을 끊임없이 준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얼굴만 봐도, 그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억눌려 살아왔는지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물에서 놀고 또다시 대강당에서 댄스파티를 열었다. 요즘 아이들은 모두가 아이돌이고 모두고 디제이이다. 유튜브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면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때로는 다 함께 떼창을 부른다. 쉬지 않고 노는 아이들. 평소에 성당에서 1시간 정도 미사만 같이 보던 그 얌전하던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각자의 끼를 발산하느라 바빴다. 이렇게 2박 3일을 함께 지내보니 더 아이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명 한 명 더 이해하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과 있을 때의 모습 또한 찐하게 볼 수 있었다.

둘째 날은 아이들도 힘들었던지, 12시가 넘으니 하나 둘 잠을 자기 시작하더니 새벽 2시가 넘으니 모든 아이들이 곯아떨어졌다. 모든 아이들이 다 잠을 자는 것을 확인한 후 선생님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씻고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5명의 선생님과 신부님, 수녀님, 학사님, 그리고 분과회장님 이렇게 9명의 어른이 55명의 아이들을 통솔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만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매일 같이 기도했다. 다행히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나니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마지막 날, 캠프의 꽃 롤링페이퍼를 돌리며 우리는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며 마지막 추억을 남겼다. 수련회장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으며,

“선생님~ 며칠 더 있고 싶어요~”

“왜 2박 3일이에요? 다음에는 5박 6일로 가요~”

“겨울 캠프는 언제 해요?”

라고 모두가 아쉬워했다.

벌레도 많고 냄새도 나며 좁디좁은 방도, 친구들과 함께 하니 더 있고 싶어지는 곳이 된 것이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은 학원 가랴 공부하랴 바빠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단호하게 “2박 이상하면 신부님이랑 수녀님, 선생님들 힘들어서 큰일 나~”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사실은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레드썬! 되어 정신없이 잠을 잤다. 성당에 도착하니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그 모습을 보니 울컥했다. 나는 나의 아이들과 함께 캠프를 하는 행운(?)을 가졌지만 2박 3일 동안 처음으로 아이를 캠프로 보낸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괜히 울컥한 것이다. 확실히 공동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아이들은 자기 물건을 챙기는 것도 서툴렀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은 친구와 한 방을 쓰면서 서로 배려하며 생활해야 하는 것도 앞으로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가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있고 때로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든 덕목을 공동체 생활 안에서 배워야 한다. 몸은 힘들었지만 2박 3일 동안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이러한 공동체 생활을 아이들이 자주 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라는 단절된 시간, 그리고 점점 더 개인화되어 가는 요즘. 요즘 아이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며, 선생님에게 왜 그렇게 대드냐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백지와 같은 존재인데, 어른들이 조금만 더 본보기를 보이며 아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더 노력만 한다면, 나는 아이들은 다시금 백지처럼 하얗고 맑은 아이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2박 3일 동안 나는 그렇게 백지처럼 맑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았다.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았던 것은 아닐까? 공부가 전부인 세상인 것처럼 무언의 압박은 준 것은 아닐까?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남탓하며 타인을 비난한 모습을 아이들 앞에서 보인 것은 아닐까? 지금도 무너진 교권을 운운하며 남의 탓만 하고 서로 편 가르기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우리 어른들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이번 캠프기간 동안 내 머릿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절대로 혼자살 수 없는 세상. 인터넷이 점점 더 발달하면서 세상은 더 촘촘히 연결되고 있다. 더 많은 국가의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게 될 세상이 온다. 그런 세상인데 자꾸 컴퓨터 화면 속 세상이 진짜인양,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은 착각한다. 대인관계를 맺을 기회도 없고 관심조차 없다. 그렇기에 공동체 생활을 다른 여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학교가 되었든 마을이 되었든 상관없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갇힌 세상에 살았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 몸은 정말 고단했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 캠프를 기쁜 마음으로 또다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어렸을 적, 첫 캠프가 잊히지 않듯이 우리 아이들도 이번 여름 캠프가 평생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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