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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Feb 06. 2022

산사(山寺)

가라앉은 죽림 너머로 땅거미가 드리웠다 비 소리는 날보다 빠르고 날보다 느렸다 풍경은 새로 깔린 밤의 어귀로 개벽했다 종각은 어쩐지 울리지 않았고 멀리서 탁탁 낙엽 타는 소리만 났다 비구니들이 자리를 따라 나물밥을 놓았다 합장이 빈 그릇으로 끝났고 나는 그것이 서러웠다 일주문 어귀의 냇가로 가 세수를 하고 입을 씻었다 다문천의 눈을 타 넘는 담쟁이를 보고도 모른척 했다 달이 뜨면 대웅전에서 목탁소리가 울렸다 노승은 죽은 나무처럼 정좌한 채 묵연했다 나는 촛불처럼 서 있다가 경을 읊었다 절을 올렸다 또 경을 읊으며 절을 올렸다 헛기침에 물러서는 걸음을 아무 소리 없이 갈음했다 닫혀버린 문 너머로 향연이 오르고 번졌다 연기는 대웅전 밖 단청을 지나 도회의 야경으로 꾸물꾸물 물러갔다 풍경의 어귀는 밝고 중심은 어두웠다 나는 낯설게 비어버린 머리를 두드리며 울었다 밤의 산사엔 행자도 보살도 없었다 석자 하나와 동자승이 합장을 하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승복을 벗지도 않고 울음을 씹으며 죽은 것들과 산정(山頂)으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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