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가르드로 돌아온 로키는 몸조리를 핑계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안에틀어박혔다. 몸조리도 몸조리였지만 샤치와의 약속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샤치와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고, 어떻게든 로키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로키는샤치와의 약속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그리고 누워있는 동안 로키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텄다. 자신이 끌려가는데도 오딘과 헤니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헤니르야, 원래 잘생긴 바보니 그럴 수 있어. 그러나 오딘이라면 나를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로키는 이런 생각을 도무지 떨치기 힘들었다. 오딘이 많은 전사를 모으게 된 것도 사실 자신의 덕택이 아니던가? 그리고 자신은 프레이야의 목걸이에 내막을 지금까지 입을 닫아준 은인이 아니던가. 한 번 의심을 시작하자,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사실 이건 로키가 스스로를 납득시킬 명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이미 로키의 마음 한 켠에서는 신들을 골탕 먹일 꺼리가 생겼다는 즐거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오딘과 헤니르가 정말 로키를 모른척했다면 굳이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만, 천성적으로 로키에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로키는 샤치와의 약속도 지키고, 자신도 즐거운 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사고를 기꺼이 치기로 마음먹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이둔을 꾀어내서 샤치에게 데려갈지에 대한 것뿐. 뭐, 그 뒷일은 그때의 로키가 알아서 할 테니, 지금의 로키는 좋은 계획만 세우면 되는 일이다. 침대에 누운 로키는 즐거움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 즐거우니 몸이 아픈지도 몰랐다. 그리고 계획이 완성되자, 로키는 곧바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로키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브라기의 저택으로 향했다. 로키는 곧장 저택 옆에 있는 뜰로 향했다. 이둔은 이곳에서 사과나무를 키웠는데, 이 나무의 열매를 '젊음의 사과'라고 불렸다. 이 사과를 먹으면, 언제나 젊은 상태로 활기 있게 지낼 수 있었다. 신들이 오랜 시간 동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이둔이 키우는 '젊음의 사과' 때문이었다. 로키의 예상대로 이둔은 이곳에서 사과를 따고 있었다. 로키는 아주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이둔에게 다가갔다.
[오호~~ 올해도 사과가 풍년이로고~]
[어머? 안녕하세요, 로키님. 몸은 좀 어떠세요?]
이둔은 로키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로키는 자신이나 남편인 브라기와 그다지 친분은 없었고,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만도 했으나 이둔은 친절하게 로키를 맞이했다. 이 하얀 팔의 여신은 착하고 순진했다. 모두에게 친절했고, 정도 많아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이 이둔을 아꼈다. 이둔은 언제나 웃음도, 눈물도 많은 소녀 같은 모습으로, '젊음과 청춘'이라는 상징에 걸맞은 여신이었다. 브라기가 이둔에게 반한 것도 이런 순수하고, 소녀 같은 모습 때문이었다. 로키가 아스가르드의 대표적 사고뭉치였지만, 이둔은 이런 로키에게도 친절했다. 이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 젊음과 청춘의 여신, 이둔. 헤르만 빌헬름 바이센 작(185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I%C3%B0unn)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답니다. 마침 로키님께 문병을 가려고 사과를 고르고 있었어요.]
[아이고~ 뭘 문병까지.. 내 그렇지 않아도 이둔의 사과가 먹고 싶었거든. 그래서 누워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네.]
로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둔은 바구니에 든 사과 중에서 가장 크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꺼내 로키에게 주었다. 사과를 건네받은 로키는 맛있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이둔의 사과는 언제나 맛있고 달콤했다. 로키는 맛있게 사과를 씹어 삼킨 뒤, 자신의 팔뚝을 두드렸다.
[이야~ 역시 이둔의 사과야~ 벌써 건강해지는 느낌인걸~]
로키의 장난에 이둔도 활짝 웃었다. 마치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은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로키는 사과를 마저 먹으며, 이둔의 사과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손을 탁 쳤다.
[아, 맞아! 깜빡할 뻔했네. 이둔, 혹시 오딘이 무슨 말 안 해?]
[네? 아버님이요? 저에게요?]
이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로키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 그 양반이 그럴 줄 알았어. 아니, 아무리 며느리가 예쁘기로서니.. 이런 건 말해주는 게 좋은 건데.. 아하이..]
이둔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로키가 말을 이었다.
[실은 이번에 오딘이랑 여행을 갔다가 숲에서 요상한 사과나무를 발견했거든. 그 나무에 달린 사과가 어찌나 크고 맛있던지.. 솔직히 누워있으면서도 그 사과의 맛이 떠오르더라고. 사실 그래서 이렇게 서둘러 온 거지. 이 사과도 맛있고, 효과도 좋지만.. 그 사과나무의 사과에 비하면 좀 모자란 것 같아.]
로키는 가만히 이둔의 눈치를 살폈다. 이둔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로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헤니르가'세상이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또 없을 거야. 이둔의 사과도 이렇게 맛있지는 못할껄?' 하더라고. 오딘도 말은 안 했지만, 내심 동의하는 것 같았구..]
이둔이 로키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이 사과나무는 제가 직접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를 맺는 아이로 골라온 거라구요! 제 사과보다 맛있는 사과는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럴까? 흠.. 이 나무 언제 심은 거지? 꽤 오래전으로 알고 있는데.이 정도면 세상에 새로운 품종의 사과나무가 생겨도 이상하지는 않지.]
로키는 한 번 더 이둔을 도발했다. 이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둔은 자신이 키우고 가꾼 사과나무에 대해 자신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로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로키님, 정말로 그 사과가 그렇게 맛있었어요?]
[미안하지만.. 응. 진짜 맛있었어. 있잖아, 이둔. 지금 가서 직접 보고 오지 않겠어?]
로키가 은근하게 이둔에게 말했다.
- 로키와 이둔, 존 바우어 그림(1911.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I%C3%B0unn)
[지.. 지금이요?]
[응. 아무래도 이쪽은 이둔이 가장 잘 아니까. 네가 직접 살펴보고, 맛도 보면 가장 잘 알지 않을까? 멀지도 않아. 내 말처럼 더 좋은 녀석이면, 이리 가져와서 심는 게 좋잖아. 아마 그 사과 맛을 다시 보게 되면, 오딘도 좋아할 거야. 역시 우리 며느리구나~ 하구.]
로키의 말에 이둔은 망설였다. 이둔은 그 새롭다는 사과나무가 보고 싶었지만,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음.. 어쩌지.. 그럼 그이에게 이야기해 볼게요.]
[에헤이~ 뭘 브라기까지 귀찮게 해. 어차피 길안내도 해야 하니, 내가 같이 가줄 텐데. 정말 안 멀다니까. 금방 다녀오면 돼. 지금 출발하면 오후 정도면 그 나무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지. 아무렴~]
잠시 망설이던 이둔은 곧 마음을 정했다.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말에 이둔은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챙겨 로키를 따라나섰다. 로키는 이둔을 데리고 태연하게 아스가르드의 정문으로 향했다. 마침 헤임달은 부하들을 데리고 순찰 중이었는데, 역시 로키의 계획대로였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헤임달에게 들켜 일을 망쳤던 경험이 있던 로키인지라, 이번만큼은 헤임달의 순찰시간과 동선을 완전히 파악하고 움직였다. 로키는 정문을 지나, 이둔을 재촉해 맛있는 사과가 열린다는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