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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Feb 28. 2023

11.검은산의 여전사-여덟 : 트림헤임에서의 9일

북유럽 신화, 스카디, 뇨르드, 트림헤임, 신접살림

#. 트림헤임에서의 9일


 피로연이 끝나고 나서 뇨르드와 스카디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뇨르드와 스카디는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신혼부부가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이기도 했는데.. 바로 '신접살림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단순하게 이제 스카디도 아사 신족이 되었으니, 아스가르드에서 살면 되는 것으로 정리될 문제가 아니었다. 뇨르드도, 스카디도 아스가르드는 자신의 집이 아니었고, 각자 소유한 영지와 백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뇨르드는 '노아툰(Noatun : 선착장)'이라는 지역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다. 노아툰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스가르드에 속한 곳인지, 미드가르드에 속한 곳인지도 불명확하다.(일설에는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노아툰이 바닷가라는 설명과 불일치)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에 접한 넓은 지역이었다. 뇨르드가 아스가르드로 오자, 오딘은 뇨르드에게 노아툰 지역을 내어주며 다스리게 했다. 반 신족의 지도자였던 뇨르드에 대한 오딘의 배려였다. 다른 신들은 아스가르드 성벽 안에 있는 저택이 딸린 일정 지역 만을 소유할 뿐, 노아툰처럼 거대한 지역을 영지처럼 받은 것은 뇨르드가 유일했다. 오딘은 뇨르드에게 일정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뇨르드와 그의 자식들을 아사 신족의 일원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동시에 헤니르와 미미르를 내쫓은 반 신족에 대한 경쟁의 의미도 있었다. '너희는 우리의 사람을 죽이고 내쫓았지만,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이 아량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뇨르드는 흔쾌히 노아툰을 영지로 받았다. 이는 노아툰에 사는 사람들과 모든 존재를 다스리며, 그들의 삶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오딘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지만 뇨르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신족 간의 전쟁은 참혹했고, 앞장서서 아사 신족과 싸우던 뇨르드는 인질이 되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이런 뇨르드의 생각과는 달리 오딘과 아사 신족은 자신과 아이들을 자신들의 일족으로 받아주고, 일족보다도 더 잘 대해주었다. 뇨르드는 진심으로 노아툰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고자 했다. 노아툰에 사는 사람 한 명, 꽃 한 송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아꼈다. 이런 뇨르드의 모습에 감동받은 백성들도 뇨르드를 잘 따랐으며, 노아툰은 점점 풍요로운 곳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편, '트림헤임(þrymheimr)'을 비롯한 샤치의 모든 것은 이제 스카디의 것이 될 것이다. 스카디도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었다. 샤치는 요툰헤임에서도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산도 많고,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카디는 정당한 상속자로서 트림헤임에 살고 있는 거인들을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을 책임져야 다. 물론 스카디의 욕심 많은 두 삼촌들이 샤치의 유산을 보며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들은 샤치의 유산을 노리며 다툴 것이 뻔했고, 그렇게 된다면 트림헤임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져 재만 남을 것이다. 스카디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트림헤임을 사랑했고, 그곳의 거인들을 위해서라도 샤치의 유산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신과 인연을 맺었으니, 스카디는 신과 거인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했다. 신과 거인 사이에는 피가 되어 흐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상호불신과 적대감이 팽배했다. 샤치와 스카디도 그랬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요툰헤임의 다른 거인들과 신들이 어찌 되는 건 알바가 아니지만, 적어도 트림헤임과 아스가르드 사이에는 어떠한 마찰도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스카디가 트림헤임을 다스려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두 사람은 9일씩 서로의 영지를 함께 오가며 지내기로 결정했다. 먼저 스카디의 트림헤임에서 9일을 지내고, 다음에는 뇨르드의 노아툰에서 9일을 지내기로 했다.




 다음날, 스카디는 뇨르드와 함께 트림헤임으로 향했다. 스카디는 자신이 트림헤임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처럼 뇨르드의 마음에도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림헤임으로 향하는 내내 스카디는 트림헤임에 대해서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뇨르드, 요툰헤임도 살기 좋은 곳이에요. 트림헤임은 요툰헤임에서도 특히 아름답다구요. 높은 산 위에는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아서 일 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어요. 또 사냥하기 좋은 곳도 정말 많아요. 그리구.. 그리구... 아, 우리 집 근처가 바로 바다랍니다. 당신은 바다를 그렇게 좋아한다죠?]


뇨르드가 스카디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소. 내가 사는 노아툰도 바닷가라오. 난 바다의 그 푸르름과 생명을 가득 담은 그 풍요로움을 좋아하지.]

[응! 나도 그래요! 바다는 꼭 하늘이 담긴 것 같아요!]


 스카디가 뇨르드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사랑에 빠진 새 신부의 미소였다. 스카디는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과 마음으로 트림헤임에 돌아왔다. 스카디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이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스카디와는 달랐다. 모두가 놀라고 겁을 먹은 모습이었지만, 스카디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모두가 반가웠다.


 스카디는 뇨르드의 손을 잡고,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샤치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스카디의 귀환소식에 반갑게 달려 나오던 부하들과 하인들은 그만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분노에 차서 달려 나간 스카디가 웬 나이 많은 놈팽이의 손을 잡고 돌아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스카디는 뇨르드와 함께 저택의 홀로 들어갔다. 홀의 끝 가장 높은 자리에 샤치의 의자가 놓여있었다. 스카디는 뇨르드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걸어가 샤치의 의자에 앉았다. 스카디는 부하들과 하인들에게 자신이 샤치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이 뇨르드와 혼인했음을 알리고, 뇨르드를 자신처럼 바라보고 따를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부하들과 하인들의 놀라움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샤치의 복수는커녕, 불구대천의 원수인 신을 남편으로 삼다니. 더군다나 스카디를 섬기듯, 신을 섬기라는 말에 부하들도, 하인들도 모두가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스카디는 기분이 상했다. 스카디는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목소리로 화를 냈다. 샤치 못지않은 위엄과 공포가 부하들과 하인들을 덮쳤다. 스카디의 위엄에 부하들과 하인들 모두 무릎을 꿇고 복종했다. 스카디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트림헤임의 주인이 되었으며, 신과 혼인한 사실을 트림헤임 곳곳에 알리게 했다. 


- 트림헤임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독일 쾨니히스제,  올리버 키스 사진(2018. 출처 : https://unsplash.com/ko/@farnorthern) 


 스카디의 명령은 부하들을 거쳐 곧 트림헤임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트림헤임 거인들의 반응도 저택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악했고, 두려움과 불안함이 트림헤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나이는 어렸지만, 역시 스카디는 샤치의 딸이었다. 스카디는 계획이 있었고, 이전보다 더욱 예민하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저녁이 되자, 스카디는 부하들과 하인들을 모두 불러 연회를 열었다. 그들 한 명, 한 명과 마주 앉아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다음날부터는 뇨르드와 함께 저택으로 찾아오는 거인들을 만났고, 때로는 뇨르드와 함께 거인들을 찾아가 만났다. 모두가 트림헤임의 유력자들이다. 스카디가 샤치의 유산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스카디는 안내를 하겠다며 뇨르드와 함께 트림헤임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뇨르드와 함께 눈 덮인 산에 올라 스키를 탔고, 숲과 들판을 달리며 사냥을 하고, 바다에 나가 낚시를 즐겼다. 하루는 뇨르드의 팔짱을 낀 채, 트림헤임의 장터에 나아가 한가롭고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얼핏 보면 여느 신혼부부처럼 다정한 시간을 보낸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스카디의 노림수가 있었다. '이제 나 스카디가 트림헤임의 주인이다! 그러니 트림헤임에 사는 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했다. 물론 스카디는 뇨르드와 함께 한 그 모든 시간 동안 뇨르드에게 충실했고,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다만 정치적인 요소를 조금 가미했을 뿐이다. 스카디는 트림헤임 내의 여러 가지 일로 처리할 것이 많았는데, 그럴 때 뇨르드는 저택 근처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이 날도 뇨르드는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사실 트림헤임에 온 그날부터 뇨르드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편하지 못했다. 트림헤임에서 마주친 거인들은 하나같이 뇨르드에게 겁을 먹거나 경계했다. 그중에는 노골적인 비웃음과 분노를 보이는 거인도 많았다. 스카디가 붙여준 시종들이 자신을 떨떠름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뇨르드는 스카디에게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인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다.


 뇨르드는 스카디가 너무 안쓰럽고 애잔했다. 뇨르드는 스카디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잘 알고 있었다. 스카디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오랜 시간을 권력과 정치의 세상에서 살아온 뇨르드였으니까. 뇨르드는 스카디와 함께 만났던 이들을 떠올렸다. 겉으로는 스카디를 따르는 척하지만 뒤에서 무슨 짓을 꾸밀지 뇨르드에게는 뻔히 보였다. 스카디의 삼촌들은 물론 트림헤임에도, 그 주변에도 샤치의 유산을 노리는 이들은 차고 넘쳤다. 그에 비해 스카디의 지지기반은 약했다. 그럼에도 저들이 일단 스카디에게 굽히는 것은 스카디의 곁에 뇨르드, 아니 정확하게는 아스가르드와 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스카디에게 맞서는 것은 곧 아스가르드에 맞서는 것이 된다. 신과 거인이 원수사이라지만,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지금 그들의 힘으로는 아스가르드에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스가르드를 등에 업고 있다고 해서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며칠 뒤면 스카디는 뇨르드를 따라 노아툰으로 갈 것이다. 다시 트림헤임으로 돌아오는 것은 9일이 지난 뒤다. 스카디는 아스가르드를 등에 업은 지금 최대한 트림헤임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뇨르드는 자신의 어린 아내가 권력과 정치의 서슬 퍼런 칼날 위를 걷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 바다를 그리워하는 뇨르드, W.G.콜린우드 그림(190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ka%C3%B0i)


 뇨르드에게는 힘든 것이 또 하나 있었다. 트림헤임의 환경은 뇨르드로서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트림헤임은 삭막하고 척박한 곳으로, 여름이 되어도 싸늘하고 추운 바람이 불었다. 특히 저택이 있는 검은 바위산 지역은 더욱 심했다. 높은 바위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거셌고, 그때 들리는 바람소리는 마녀들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밤에는 더욱 심해졌고, 그 사이사이 묻어있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뇨르드의 잠을 방해했다. 뇨르드는 한 숨 못 자고 뒤척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검은 바위산은 칼날처럼 거칠고 높았다. 산 위쪽에는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눈으로 덮여 있고, 그 아래로는 울창하다 못해 검게 보이는 어두운 숲이 자리했다. 이 검은 바위산과 숲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괴물이 떼로 지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트림헤임의 바다도 뇨르드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얼음덩어리가 떠있는 바다는 잿빛이 섞인 파란색이었고,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바닷가는 온통 조약돌과 바위, 조각난 얼음으로 가득했다. 뇨르드는 망토의 깃을 더욱 높이 세웠다. 뇨르드에게 트림헤임은 너무도 어둡고, 춥고, 거친 곳이었다.


 천천히 시간은 흘러 어느덧 약속한 트림헤임에서의 9일이 지났다. 스카디는 뇨르드와 함께 노아툰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스카디는 표면적으로나마 트림헤임을 장악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9일 뒤, 스카디가 다시 트림헤임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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