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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r 09. 2023

12.겨울을 사랑한 봄-넷 : 역적모의? 아니 구애모의

북유럽 신화, 스키르니르, 프레이, 게르드, 기미르

#. 역적모의? 아니 구애모의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지만, 흘리드스캴프에 다시 앉을 수는 없었다. 프레이는 이런 것을 분간하지 못할 성품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이지만. 대신 프레이는 정무를 보는 틈틈이 발할라에 보관된 정보들 사이에서 그녀와 관계된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게르드(Gerðr : 울타리, 들판)'. 요툰헤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한 세력가인 '기미르(Gymir : 바다 또는 대지, 보호자)'의 딸이다. 기미르라는 이름은 스키르니르도 들어본 적이 있다. '샤치(Þjazi)'에 못지않은 힘과 부를 지닌, '거인의 왕'이라는 소리를 듣는 세력가다. 그런 거인 세력가의 딸이라면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신과 거인은 원수지간이다. 프레이는  신족이지만, 거인들이 보기엔 아사 신족이나 반 신족이나 어차피 똑같은 신이다. 정식으로 혼담을 넣는 것 자체도 어렵고, 어찌어찌 혼담을 넣는다고 해도 기미르가 여기에 응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게르드다. 그녀가 프레이의 구애를 거부하면 그걸로 혼담이고 뭐고 다 끝이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얻을 수 있을까? 게르드,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너, 프레이야.]


스키르니르가 이렇게 대답할 만큼, 처녀들에게 프레이의 인기는 높았다. 그러나 프레이는 이런 평판에 기대기보다는 자신의 진심으로 그녀를 얻고 싶었다.


[그것으로는 안돼. 나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어. 그러려면 그녀를 직접 만나야 할 거야. 하지만 난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오딘님이 언제 돌아오실지도 알 수 없고...]

[흠.. 그렇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그녀에게 너의 마음을 전하겠어.]


스키르니르의 말에 프레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주겠어?]

[당연하지!]


스키르니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프레이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가 내 구애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기미르가 혼담을 거절해 버리면 그뿐. 신들도 우리를 축복해 주지 않을 거야.]


낙담한 프레이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스키르니르는 결심한 듯 프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지.]

[응?!]


프레이는 당황스러웠다. 일단 저지르라니..


[잘 들어봐. 어차피 정석대로 진행하면, 신과 기미르 어느 쪽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럼 별수 있어? 일단 사고를 먼저 쳐야지. 너와 게르드가 먼저 거사를 치르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겠냐~ 내가 책임지겠다!' 하며 배짱으로 나가는 거야. 그때 가서는 신들도, 기미르도 무를 방법이 없어지지. 솔직히 오딘을 보라고. 거인 중에 오딘의 애첩이 좀 많아? 그런다고 신들이 뭐라고 하진 않지.]


스키르니르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프레이의 성격상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오딘님이랑 나는 좀 다르지. 난 아내로 맞이하려는 거야.]

[다를게 뭐야? 같은 거야. 그게 정 걱정이 되면, 먼저 둘만의 결혼식을 올려. 내가 증인이 될 테니까.]


스키르니르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프레이도 이 제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내가 게르드와 먼저 혼인을 한다면 그땐 부부인 거니까.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을 거야. 스키르니르, 네가 증인이 되어줄 거지?]

[물론이지!]


 스키르니르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프레이는 자신의 친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스키르니르는 친구의 등을 토닥였다. 두 친구는 계획을 세웠다. 게르드를 만나기 위해서는 기미르의 저택으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 기미르는 요툰헤임에서도 이름난 세력가이다 보니, 저택의 규모에 걸맞은 경비가 배치되어 있다. 아무리 스키르니르라고 해도 거인들이 많다면, 상대하기는 힘들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은 난관일 거야. 기미르의 저택도 크고 넓은 데다 지키는 거인들도 많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쉽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거인 서넛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어둠을 거침없이 달리수 있는 말 한 필과 튼튼한 검만 있다면 걱정 없다고! 또, 너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불꽃 속이라도, 아무리 거인족이 떼거지로 모여있더라도! 반드시 그녀를 너의 신부로 만들어주겠어! 나를 믿어!!]


스키르니르는 몇 번이고,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프레이와 스키르니르는 계획을 마저 정리했다.


- 프레이와 스키르니르, 알렉산더 지크 그림(1906. 출처 : https://www.germanicmythology.com/)


 스키르니르는 곧바로 구애에 필요한 예물 준비에 들어갔다. 스키르니르가 처음으로 찾은 곳은 브라기의 저택이었다. 스키르니르는 이둔을 찾아가 '젊음의 사과'를 하나 얻었다.(전승에 따라 젊음의 사과를 열한 개나 얻었다고 하기도 함) 이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 예물이었다. 스키르니르가 생각한 두 번째 예물은 반지였다. 그것도 보통 반지가 아닌 '드라웁니르(Draupnir : 떨어지는 것)'였다. 프레이가 주는 구애의 예물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키르니르는 은밀하게 발할라의 보물창고로 숨어들었다. 괜히 로키에 버금간다는 소리를 듣는 스키르니르가 아니었다. 드라우프니르는 9일간 8개로 불어나는 마법의 반지이다 보니 반지가 보관된 상자는 이내 반지로 가득했다. 하나 정도 없어진다고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스키르니르가 필요한 것은 하나면 충분했기에 그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았다. 돌아나가려던 스키르니르의 눈에 지팡이가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오딘의 지팡이, '감반테인(Gambantein : 마법의 지팡이)'이었다. 감반테인이 어떤 지팡이인지는 스키르니르도 잘 알고 있었다. 거인들을 상대하는데 요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스키르니르는 감반테인도 챙겨가기로 했다. 어차피 창고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으니까.


[잠깐만 빌리겠습니다. 금방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둘께요~]


 스키르니르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은밀하게 발할라를 빠져나왔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헤임달도 그때는 외부를 주시하고 있던 참이라 발할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키르니르는 예물을 챙겨 곧바로 프레이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스키르니르가 요툰헤임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자, 프레이가 그를 마구간으로 불렀다. 프레이는 스키르니르에게 자신의 애마인 '블로두그호피(Bloðughofi : 피범벅이 된 발굽)'의 고삐를 건넸다.


[이 아이라면 널 아무 문제 없이 요툰헤임까지 데려갔다가 올 수 있을 거야.]


 고삐를 받아 든 스키르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가 이번에는 검 한 자루를 스키르니르에게 내밀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에 담긴 아주 귀해보이는 검이었는데, 스키르니르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스키르니르는 무릎을 꿇고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냐! 이건 안돼! 이건 안됩니다! 프레이님!]

[아니야! 받아줘! 이 아이는 반드시 널 지켜줄 거야.]


 프레이가 더욱 강하게 말했다. 그 검은 프레이의 보물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는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이었다. 강철이나 돌도 손쉽게 벨 수 있고 날이 상하지 않으며, 검 스스로 의지를 가진 마법의 검이었다. 거인이 검의 주인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스스로 맞서 싸워 거인으로부터 주인을 지키는 '명검(名劍)'이다.


 프레이는 언젠가 '노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녀들이 말하길 프레이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이야말로 프레이와 신들을 파멸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말하길, 결코 다른 이의 손이 닿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프레이는 그녀들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 프레이에게는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예언보다, 자신의 사랑과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건 친구가 더 소중했다. 스키르니르는 못 견딜 정도로 난감했다.


[안돼.. 이걸 내가 받으면 너는...]

[괜찮아. 이 아이가 없다고 해도, 나에겐 네가 있어. 나의 가장 최고의 보물이자, 최고의 검은 바로 너 스키르니르야. 그곳이 어디건, 어떤 전장이건 내 곁에는 네가 함께 할 테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곧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 토르와 티르처럼 이곳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전사들이 차고 넘쳐. 내가 직접 싸울 기회는 오지도 않지. 또, 내가 직접 싸운다고 해도 굳이 이 아이가 아니라도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잖아?]


 프레이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검을 내밀었다. 프레이에게 검을 받아 든 스키르니르는 울고 있었다. 결코 프레이의 기대와 사랑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반드시 프레이를 지키겠다고. 이미 그러고 있었지만, 스키르니르는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스키르니르는 프레이의 검을 허리에 찼다. 게르드에게 줄 예물은 가슴속 깊이 숨겼고, 감반테인은 블로두그호피의 안장에 걸었다. 스키르니르는 프레이의 배웅을 받으며 요툰헤임을 향해 달려갔다. 프레이는 스키르니르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반드시 성공해 주기를 바라고 바랐다. 프레이는 이것이 그의 평생에 유일한 실책이 될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오직 게르드를 향한 사랑만이 프레이의 모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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