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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r 10. 2023

12.겨울을 사랑한 봄-다섯 : 불꽃의 담을 넘어

북유럽 신화, 프레이, 스키르니르, 블로두그호피,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

#. 불꽃의 담을 넘어


 친구를 위한 우정과 충성으로 불타는 스키르니르는 요툰헤임으로 말을 달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지금의 스키르니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스키르니르는 신중한 사람이다. 요툰헤임으로 말을 달리며, 그는 머릿속으로 게르드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점검하고, 수정하고, 새롭게 추가했다. 기미르가 다스리는 땅에 들어서자, 스키르니르는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그리고 떠돌이 방물장수로 위장했다. 스키르니르는 고객을 찾는 척, 기미르의 저택을 조용히 돌면서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저택이 보이는 높은 언덕을 발견했다. 스키르니르는 저택의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언덕 위로 올라갔다. 언덕 위에는 목동으로 보이는 어린 거인이 양을 치고 있었다. 목동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양 떼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키르니르는 나무 등걸에 말고삐를 메어두고는 목동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목동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목동이 '이 사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스키르니르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되다~]


스키르니르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품에서 주섬주섬 육포 몇 조각을 꺼냈다. 그러고는 혼자 맛있게 육포를 뜯었다. 목동은 육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스키르니르는 슬쩍 목동을 보더니 육포를 건네며 말했다.


[그쪽도 같이 먹을라우?]

[당연하죠.]


목동은 사양 한 번 없이 육포를 받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근데 뭐 하는 분이슈?]

[떠돌이 방물장수요. 이 동네가 잘 산다고 해서 뭐 좀 건질 게 있을까.. 하고 왔는데, 재미가 없네. 그나저나 양을 치는 것도 졸리겠어.]


스키르니르가 물이 담긴 통을 건네자, 목동은 물을 받아 벌컥거리며 마셨다.


[아고~ 감사~ 하.. 말도 마요. 근데, 사실 졸아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 근처에서 양을 노릴 만한 늑대는 아주 아작이 나서. 저기 저 큰 집 보이죠? 저 집 아저씨들이 허구한 날 사냥을 한다고 설쳐대니 이 동네 늑대는 씨가 말랐죠. 아! 저 집에는 늑대보다 더한 녀석들이 있지만.]

[헤에~ 그래? 저 집이 좀 사는 것 같이 보여서 저 집에 가서 좀 팔아볼까 하는데..]


목동이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재요! 관두는 게 좋아요. 저기 저 문 앞에 파수꾼들 보이죠? 저 치들이 들여보내 줄 리가 없어요. 저 문 뒤에 있는 개들은 늑대보다 더해요. 하늘 늑대들만큼이나 사납죠.]


목동은 이내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또, 저 집주인 할배가 얼마나 성질머리가 고약한데요. 품도 잘 안쳐줘요. 완전 짠돌이죠. 그 집 아들내미들은 또 어떻구요? 그나마 막내딸은 좀 나은데, 그 누나도 도도하기가 어이쿠야~ 근데 예쁘기는 무지 예뻐요. 내가 장담하는데, 이 동네.. 아니 요툰헤임 최고의 미녀일 거예요.]

[흠.. 그럼 그 막내딸 누님을 만나야~ 물건을 팔겠구먼. 그 개들은 어떻게 좀 안되나?]


스키르니르의 말에 목동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이쿠! 큰일 날 아재네! 그 개들은 잠도 안 자요. 택도 없죠. 글구 저거 안 보여요? 개들은 피한다고 해도, 저 불로 된 담장(또는 기둥)은 못 넘는다구요.]


 스키르니르도 이미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택의 담 안쪽, 안채 쪽으로 향하는 곳에 불로 된 담이 하나 더 있었다. 불길이 꽤나 거센 것이 쉽게 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스키르니르가 아닌 블로두그호피라면, 충분히 넘고도 남을 것이다. 스키르니르가 넌지시 목동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들어갈 다른 길은 없을까?]

[아, 없어요! 난 몰라요, 몰라!]


 스키르니르의 말에 목동을 힘차게 고개를 젓더니 이내 반대편으로 돌아앉아버렸다. 폼을 보아하니 더 이상 정보를 얻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스키르니르는 남은 육포 조각을 목동 옆에 던져놓고 가만히 일어나 말을 묶어둔 곳으로 내려갔다. 뒤에서 목동이 소리쳤다.


[아재! 난 아무것도 말한 거 없는 거예요! 난 모른다구요!]


스키르니르는 언덕을 내려가며 말없이 손만 들어 흔들었다. 묶어둔 말고삐를 풀며, 스키르니르가 중얼거렸다.


[집 밖에 나왔다면, 겁은 없는 게 좋은 거란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죽을 시간은 운명이 다 알고 있거든.](스키르니르 최고의 어록이죠.)


스키르니르는 감반테인을 꺼내 등에 지듯 묶고는 블로두그호피에 올라탔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아둔 대로 저택의 옆방향으로 언덕을 따라 말을 몰았다. 그곳은 파수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높은 저택의 담을 넘으면, 바로 불의 담장이 있는 곳으로 게르드가 있을 것 같은 별채로 가는 가장 최단 거리였다. 스키르니르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리고, 겁이 많으면 이런 일은 못한단다. 가자!]


 스키르니르는 곧장 저택의 담을 향해 말을 내달렸다. 블로두그호피는 그 이름처럼 겁도 없었고, 매우 날쌘 명마다. 스키르니르가 원하는 대로 곧바로 저택의 첫 번째 담을 뛰어넘었고,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다시 뛰어올라 불의 담장마저 뛰어넘어버렸다. 저택을 지키는 파수꾼도, 하늘 늑대보다도 사납다는 경비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날렵했다. 어찌나 빠른지 언덕 위에 있던 목동은 스키르니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 불의 담장을 넘는 스키르니르, C.E.브록 그림(1930. 출처 : http://www.germanicmythology.com/ )


 그러나 블로두그호피의 날렵함은 여기까지였다. 불의 담장을 넘어 안채 뜰에 내려앉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뜰에 있는 의자에 앉은 거인 하나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스키르니르도 자신의 앞에 거인이 있음을 알았다. 가급적 게르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주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거인은 스키르니르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켜 의자 옆에 걸어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하! 이건 또 뭐야?!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 웬 놈팽이야!]


 거인은 좌우로 목을 풀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근육에서 우두둑하는 소리를 냈다. 체격이나 검을 든 폼이 예사 거인 같지는 않았다. 팔뚝에 보이는 많은 상처들은 그가 상당히 많은 싸움을 견뎌낸 전사임을 말해주었다. 스키르니르는 블로두그호피에서 내렸다.


[난 게르드에게 구애하러 온 사신이오. 그녀에게 안내를 해주면 좋겠는데?]

[하~ 나..  어떻게 니들은 질리지도 않냐..]


 거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키르니르를 가로막은 거인은 게르드의 오빠 중 하나였다. 그동안 기미르의 딸, 게르드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수없이 많은 구혼자가 이 저택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 중 그 누구도 기미르의 마음에 든 자는 없었다. 기미르는 자신의 막내딸을 매우 사랑했고, 아무에게나 시집보낼 생각도 없었다. 게르드의 오빠들도 게르드를 아끼는 마음은 아버지인 기미르 못지않았다. 이들도 별 볼 일 없는 자에게 막내 여동생을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르드도 마찬가지였다. 처녀로 늙어 죽을지 언정, 가족들의 마음에 들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결코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억지로라도 게르드를 만나려 하거나 심지어 납치를 꾸미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이 집에 숨어든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때마다 기미르의 하인들이나 게르드의 오빠들에게 들켜 곤죽이 되게 두들겨맞거나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급기야 저택의 안채 쪽에 불의 담장을 만들고, 게르드의 오빠들이 돌아가가며 게르드를 지켰다. 게르드의 오빠인 거인이 스키르니르를 노려보며 검을 빙빙 돌렸다. 스키르니르는 프레이에게 받은 검이 아닌 자신의 두 자루 검을 뽑았다.


[난 그 녀석들과는 조~금 다른데..]

[하! 이 비열한 놈. 왼손에 검을 들어?]


 거인이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스키르니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키르니르도 당당하게 버티고 거인에 맞섰다. 잠시 안채의 뜰에서 거인과 스키르니르의 매서운 공방이 오갔다. 스키르니르는 자신했듯 어지간한 거인 서넛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지만 이 거인은 달랐다. 기미르의 아들답게 보통 전사가 아니었다. 힘도, 속도도 뭐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수많은 싸움터를 버텨낸 스키르니르였지만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거인의 공격을 간신히 밀어낸 스키르니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게르드가 있는 별채 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가지 못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저택의 다른 이들도 상황을 알아챌 것이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거인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스키르니르는 옆구리 쪽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프레이에게 받은 검이 거인의 위협을 알아채고 우는 소리였다. 스키르니르는 가만히 검을 고정하고 있는 잠금쇠를 풀었다. 그러자 검이 곧바로 튀어나와 거인과 스키르니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은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엷은 푸른빛을 내뿜었다.


[썩을! 이건 또 뭐야?!]


거인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이 스키르니르를 대신해 거인과 맞섰다. 거인은 당황했다. 누군가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검 스스로 맞서 싸우는 것은 경험한 적이 없다. 게다가 검을 든 상대가 없이 검만 움직이니 검이 어디로 움직일지, 어디에서 들어올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당황한 거인은 아예 검 자체를 두 동강 내버리자 싶었다.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이 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추자,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슬쩍 몸을 틀어 거인의 공격을 흘리더니, 곧바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거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거인의 목이 안채의 뜰 위로 데구르르 굴렀다. 스키르니르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스키르니르도 이 검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거인이 쓰러지자, 스스로 거인을 베는 검은 양전하게 날아와 스키르니르의 손에 안겼다. 스키르니르는 다시금 프레이에게 감사했다. 이제 스키르니르를 막을 것은 없었다. 스키르니르는 가슴을 펴고, 게르드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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