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드 단테 Mar 24. 2023

13.그림니르가 말하기를-다섯 : 가면을 쓴 자

북유럽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오딘, 그림니르, 게이로드

#. 가면을 쓴 자, 그림니르


 오늘도 아스가르드는 평화로웠다. 그건 발할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딘은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한가로이 세상을 구경했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오딘은 뜻밖의 소문을 접했다. 게이로드가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고 쫓아낸다는 것이다. 얼마 전 프리그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은 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오딘은 세상을 돌려 게이로드의 왕궁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왕궁의 입구에서 몇몇 사람들이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왕궁을 향해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곧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 오딘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 게이로드가 왕궁에서 손님을 맞아 큰 연회를 벌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그 사이 얼마나 지났다고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는 것인가?


[이 녀석이.. 내가 저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오딘이 게이로드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프리그에게 아그나르와 비교하며, 자랑까지 한지라 내심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자랑하더니 당신 수양아들내미도 별거 아니네요?'


라고 말하는 프리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머리를 긁적이던 오딘은 마음을 정했다. 자신이 직접 게이로드를 만나보기로. 그리고 프리그가 알기 전에 상황을 정리해두고 싶었다. 마침 세상은 평화로웠고, 오딘도 할 일이 없어 무료하던 차였다. 오딘은 마구간으로 가서 '슬레이프니르(Sleipnir : 미끄러지듯 달리는 것)'에 올라 미드가르드로 향했다.


- 세상을 여행할 때의 오딘, 게오르그 폰 로센 그림(1886.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Odin )


 게이로드의 왕궁 근처에 도착한 오딘은 슬레이프니르를 숲 속에 숨겨두고, 자신은 늙은 여행자로 변장했다. 하얀 머리에 긴 수염을 하고, 짙은 회색의 옷을 입었다. 두건이 달린 긴 망토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으며 나무지팡이를 들었다. 오딘이 세상을 여행할 때 가장 선호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늙은 여행자나 늙은 이야기꾼으로 보일터였다. 오딘은 천천히 게이로드의 왕궁을 향해 걸었다. 왕궁 주변은 풍요로웠고, 오가는 백성들도 많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사람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이 보았던 과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오딘은 가만히 왕궁을 보았다.


[(게이로드, 대체 네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거냐..)]


 오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왕궁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길 옆에 몇 구의 시신이 목에 밧줄이 감긴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 매달린 시신들이 마치 풍경(風磬, 처마에 매다는 작은 종 같은 것으로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소리를 냄)처럼 흔들렸다. 그중에는 오딘이 흘리드스캴프에서 본 이들도 있었다. 오딘은 시신들을 지나쳐 왕궁의 입구로 다가갔다. 왕궁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오딘을 발견하고 외쳤다.


[멈추어라! 여기는 왕의 궁전이다!]


오딘이 발걸음을 멈추자, 병사가 다가왔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는 무슨 용무냐?!]

[난 '그림니르(Grimnir : 가면을 쓴 자)'라고 하오. 떠도는 여행자이자 이야기꾼이지. 임금님께 오래된 이야기라도 들려드릴까 하고 왔네만.]


 병사는 자신을 그림니르라고 말하는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허름한 옷차림에 늙은 노인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떠돌이 이야기꾼이 밥술이라도 얻어먹으러 온 것이라. 병사가 그림니르를 쫓아내려는데, 뒤에서 다른 병사가 사냥개를 데리고 다가왔다. 게이로드가 왕궁의 입구에 묶어두었던 바로 그 사나운 사냥개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사납게 달려들던 사냥개가 노인에게는 순한 양처럼 얌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사냥개는 오히려 꼬리를 말고, 그림니르의 발치에 얌전히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게이로드 왕이 말했던, 바로 '그 자'라고 생각한 병사들은 곧장 그림니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림니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순순히 붙잡혀주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게이로드에게 전해졌다. 그동안 혹시나 하던 게이로드는 낯선 여인이 전한 경고가 현실이 되자 크게 놀랐다. 여인의 경고를 따르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사실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게이로드는 분노했다. 감히 자신을 노리다니.


[(하마터면 죽을 뻔했구나!) 당장 그 자를 끌고 오너라! 내 직접 그 자를 심문할 것이다!]


 병사들이 밧줄로 꽁꽁 묶인 그림니르를 데려왔다. 병사들은 그림니르를 바닥에 강제로 꿇어 앉혔다. 게이로드는 왕좌에 앉아 그림니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리고 차림으로 보아 경고에서 들었던, 그 마법사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이로드는 간사하고 요사스러운 마법사들이 겉으로는 허름한 차림으로 경계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이로드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러나 그림니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림니르를 데리고 온 병사가 말했다.


[이 영감이 말하길.. 자신의 이름은 그림니르이고, 떠돌이 이야기꾼이라고 했습니다.]   

[닥쳐라! 너에게 묻지 않았다!]


게이로드가 화를 냈고, 병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게이로드가 다시 그림니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림니르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게이로드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게이로드는 왕좌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너를 보낸 자가 대체 누구냔 말이다! 어서 말하라! 네 뒤에 있는 게 누구냔 말이다!!]


 그림니르는 여전히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게이로드는 더욱 분노했다. 그림니르가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몸을 일으킨 게이로드는 그림니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네 놈이 죽어야 입을 열려나 보구나! 허나, 내가 순순히 죽여줄 거라 생각하느냐?! 내 네 놈의 아가리를 찢어서라도 답을 듣고 말리라! 여봐라! 이 자를 홀 가운데 기둥에 묶어라! 그리고 이 자의 주변으로 커다란 불을 피워라! 내 저 자를 꼬챙이에 꿰어 통구이로 만들 것이다!]


 게이로드의 명령을 들은 시종들과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게이로드는 그림니르를 보며 앙앙하게 웃었다.


[어디 네 놈이 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


- 회색의 간달프의 모티브가 바로 오딘이다. 영화 '호빗'중에서(출처 : https://movie.daum.net/main)


 왕궁의 홀에는 연회를 할 때 장식용 기둥을 세워두는 구멍이 몇 개 있었다. 병사들은 이 구멍 하나에 커다란 금속기둥을 세웠고, 그 양쪽으로 다른 두 개의 금속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그림니르를 끌고 와 쇠사슬로 가운데 기둥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양쪽 기둥에 장작을 쌓았다. 신하들은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게이로드가 예상한 대로 게이로드를 해치려던 사악한 마법사는 붙잡혔다. 그 배후를 밝히려는 게이로드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런다고 그림니르가 입을 열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게이로드의 성격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침묵했다. 게이로드는 그림니르가 홀 구석에 묶이는 것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게이로드의 아들, 아그나르가 아버지의 곁에 서있었다. 이때, 아그나르의 나이는 10살이었는데, 아그나르도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저 할아버지를 태워죽이시려구요? 불쌍한데.. 살려주면 안 되나요?]

[아그나르. 저 자는 아주 사악한 마법사란다. 저런 자들은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 알겠느냐?]


 자비를 구하는 아그나르에게 게이로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그나르는 불안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횃불을 든 병사가 장작더미 옆에 서서 게이로드의 명령을 기다렸다. 게이로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횃불은 그대로 장작더미 사이에 꽂혔다. 장작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그림니르의 양쪽으로 커다란 불기둥이 생겼다. 그림니르는 그 사이에 끼어 정말로 꼬치에 꿴 돼지통구이가 될 것 같았다. 장작이 타며 홀 안에 매캐한 냄새가 퍼졌고, 신하들은 모두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게이로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손님이 왔으니, 연회를 열어야겠지? 연회를 준비하라! 저 자가 입을 열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것이다!]


 시종들과 병사들이 이번에는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홀 안으로 연회용 탁자가 옮겨졌고, 술과 음식은 준비되는 대로 날라져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물론 이 술과 음식에 그림니르의 몫은 없다. 그림니르에게는 입을 열기 전까지 물 한 모금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게이로드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북유럽신화, #북구신화, #오딘, #토르, #단테, #norsemyth, #dante, #게이로드, #그림니르, #아그나르, #고문


매거진의 이전글 13.그림니르가 말하기를-넷 : 내 마음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