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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Mar 27. 2023

13.그림니르가 말하기를-여섯 : 지나간 일은..

북유럽신화, 북유럽신화이야기, 오딘, 그림니르, 게이로드, 아그나르

#.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연회는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흥겨워졌다. 분노한 게이로드도, 불안해하던 신하들도 연회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연회를 즐겼다. 술에 취한 신하들은 저마다 앞으로 나서 게이로드를 찬양하며 자신의 충성을 떠들어댔다. 그들은 그림니르를 비웃고, 욕했으며, 그 배후에 대해 온갖 추측을 해댔다. 저마다 자신이 그 배후를 처단하겠다며, 앞을 다투어 가장 충성스러운 말을 쏟아냈다. 게이로드는 단 한 번도 이들과 이들이 말하는 충성을 믿은 적이 없다. 게이로드가 필요한 만큼 쓰다가 지겨워지면 갈아버리면 그뿐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기쁜 듯이 이들의 충성을 치하하며 술잔을 비웠다.


 연회는 8일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그림니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두 개의 불기둥 사이에서 고통을 받았다. 역시나 그에게는 물 한잔, 빵 한조각도 주어지지 않았다. 8일 동안 그림니르의 앞에 던져진 것은 비난과 비웃음, 그리고 조롱뿐이었다. 그렇게 8일째 되던 밤. 긴 연회에 지친 모두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신하들과 병사들은 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게이로드도 왕좌에 앉아 무릎에 자신의 검을 올려놓고 잠이 들었다. 그림니르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기둥에 묶여있었다. 그의 양쪽으로 세워진 불기둥은 한 번도 약해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림니르를 향해 그 붉은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셨다. 8일 동안 그림니르는 잠도 자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가르침을 받은 인간 중에서 게이로드는 그 가르침을 잘 따른 이들 중 하나다. 그런 게이로드가 지금 보이는 이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신의 가르침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게이로드의 성품이 겨우 이 정도였다는 것인가? 그 이유가 전자라고 하면, 그것은 자신이 게이로드를 잘 못 가르친 탓이다. 그 이유가 후자라고 해도, 그것은 자신이 게이로드를 잘 못 본 탓이다.


[(하, 결국 뭘 해도 내가 잘못한 거구먼.)]


 오딘은 실소가 나왔다. 이깟 쇠사슬이나 불기둥 따위는 오딘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당장 그냥 끊어버리고 돌아가버릴 수도 있다. 게이로드라는 인간 따위, 저 생긴 대로 살다 가건 말건 그딴 건 상관없다. 오딘이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은 오딘 스스로 자초한 것. 오딘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8일은 바로 그런 소중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아.. 덥긴 하군. 목도 마르고. 그냥 돌아가버릴까?)]  


 뉘우침을 마친 오딘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오딘에게 다가왔다. 오딘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게이로드의 아들, 아그나르였다. 아그나르는 게이로드와 달리 따뜻한 마음을 지닌 아이였다.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잠이 들자, 아그나르는 가만히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잔 하나를 찾아 물(또는 술)을 가득 따라 그림니르에게로 다가왔다. 아그나르는 불길이 뜨거웠지만, 그보다는 이런 고문을 당하고 있는 노인이 더 걱정되었다.


[쉿, 할아버지. 목마르죠? 잠깐만요.]


아그나르가 잔을 들어 천천히 그림니르에게 물을 먹였다. 이는 오딘이 그동안 마신 그 어떤 물보다도 달고 시원했다. 그림니르에게 물을 마시게 한 아그나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나이 많은 분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하다니.. 이건 아버지께서 잘못하시는 거예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께요.]


- 오딘에게 마실 것을 주는 아그나르. 조지 라이트 그림(1908.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r%C3%ADmnism%C3%A1l )


오딘은 가만히 아그나르를 바라보았다. 이름 때문인지, 성품 때문인지.. 오딘은 옛날 보았던 10살의 아그나르가 생각났다. 우는 동생을 안아주고, 자신의 음식을 기꺼이 내주던 녀석. 바보처럼 착하고, 정직했던 아그나르. 만일 그때 게이로드가 아닌 아그나르를 가르쳤다면, 그래서 아그나르가 흐라우둥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면 달라졌을까? 지금의 게이로드가 이룬 것처럼 커다란 영토나 막강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겠지만, 사람들이 살아가기엔 더욱 좋은 곳이 되지 않았을까? 오딘답지 않게 상념이 몰려왔다. 그때, 바닥으로 번져오던 불이 오딘의 망토를 향해 붉은 혀를 내밀었고, 망토의 끝이 불에 그을렸다. 그러자 오딘이 불을 보며 말했다.


[불, 네 이 녀석! 물러나거라! 네가 위대한 척하지만, 널 들어 올린 것은 나이니라.]


 그러자 불은 황급히 자신의 혀를 붙잡았고, 몸을 사리더니 이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그나르는 깜짝 놀랐다. 오딘이 아그나르를 보며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지 말거라. 8일 동안 불길 사이에 붙잡혀 있었어도 나에게 마실 것을 준 것은 너 아그나르뿐이구나. 너야말로 이 나라의 왕으로 적합한 자로다.]


 오딘은 손을 들어 가만히 아그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샌가 오딘을 묶었던 쇠사슬도 풀려있었던 것이다.


[아그나르, 나의 축복을 받거라. 이 물 한잔으로 너는 세상 그 어떤 인간도 받지 못한 최고신의 축복을 받게 했느니라. 아주 비싼 물이지.]


 아그나르는 이 말의 뜻을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림니르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딘이 아그나르에게 물었다.


[아가야. 너는 신들이 사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니?]

[잘 몰라요. 아버지의 나라와 왕궁 근처 말고는 가본 적이 없거든요.]


아그나르가 아는 대로 대답하자, 오딘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 할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마. 잘 듣고, 기억해야 한다.]


 오딘의 말에 아그나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은 아그나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아그나르의 어깨로 옮겼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세상과 오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그나르가 모르는 내용이었다. 아그나르는 마치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손자처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오딘이 도운 것인지 아그나르는 이 이야기를 마치 가뭄에 말랐던 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기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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