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라우둥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게이로드는 충실한 신하들의 보호를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또한 이들로부터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웠는데, 게이로드는 언제나 그들의 가르침 그 이상을 보여주었다. 사실 게이로드에게는 그들에게 십여 년에 걸쳐 배운 것보다, 오딘에게 겨울 동안 배운 것이 더욱 쓸만하고 요긴한 가르침이었다. 게이로드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아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오두막의 부부, 특히 오두막의 아저씨에게 깊이 감사했다. 궁으로 돌아와 성장하는 동안 게이로드는 오두막의 부부가 보통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들은 요정이나 신일 것이고, 자신은 그들의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게이로드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로 인해 게이로드는 거침없이 자신의 뜻을 펼쳤고, 아버지보다도 더욱 왕국을 키우고 번성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이들은 거침없이 잘라내었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저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응징했다. 그중에는 게이로드를 왕으로 만들고 보호한 아버지의 신하들도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사라지거나 물러났다. 게이로드는 그의 명성만큼 악명도 높아졌다. 게이로드는 이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두막 아저씨의 가르침처럼,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욱 안전한 법이니까.프리그가 오딘에게 말한 것과 달리, 게이로드는 왕궁을 찾아오는 이들을 매우 환영했다. 게이로드는 이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들을 등용했고, 이들이 아버지의 신하들의 자리를 메꿨다. 아버지의 신하가 아닌 게이로드의 충직한 신하로서.
게이로드는 성인이 되자, 명망 있고 쓸모 있는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다. 게이로드는 아들에게 형의 이름인 '아그나르'를 주었다. 백성들은 게이로드가 어린시절 세상을 떠난 형이 그리워 아들에게 형의 이름을 주었다고 믿었고, 형제애를 상징하는 미담으로 전했다. 게이로드가 계획한 대로였다. 적에게 주는 두려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백성에게는 사랑받는 것도 필요했으니까. 실제로 게이로드는 형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들을 매우 사랑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유일한 핏줄이며,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 게이로드는 아들을 곁에두고 많은 것을 직접 가르쳤다. 그중에는 오두막 아저씨에게 받은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 아그나르는 게이로드의 가르침을 잘 배웠지만, 성품은 게이로드 보다는 형인 아그나르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사람으로서의 따스함을 잃지 않았다. 게이로드도 아들의 이런 성품을 알았지만,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사실 게이로드는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외로워지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마음을 털어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나마 아들 아그나르만이 위안이었다.
게이로드는 대체로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필요하지 않다면, 아내나 후궁과의 잠자리도 피했다. 게이로드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공포나 두려움이 가득했다. 권력을 차지하고 키우는 동안 거두어들인 목숨은 셀 수 없었고, 언제 어디서, 그 누가 게이로드의 목숨을 노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바로 자신의 형 아그나르였다. 자신의 말처럼 아그나르가 죽기라도 했다면 다행이지만, 그 이후 아그나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죽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는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그나르가 어디선가 살아남아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돌아오게 될지 알 수 없다. 게이로드는 종종 형이 돌아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꿈을 꾸었다. 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목을 베고,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그러면 늘 비명을 지르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은 채로 깨어났다. 게이로드는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라도 동침을 피했다. 늘 베개 밑에는 단검을 숨겨두었고, 침대 옆 손이 닿는 곳에는 자신의 검을 두고서야 잠이 들었다.
오늘도 게이로드는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오르려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이상한 기운은 창가 옆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느껴졌다. 게이로드는 이불을 정리하는 척하다가 베개 밑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겨누었다.
[누구냐.]
그러자 누군가가 천천히 달빛이 비치는 창가로 걸어 나왔다. 어두운 색 망토를 쓴 자였는데, 걸음걸이나 체형으로 보건대 여자가 분명했다. 망토에 달린 두건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러나 게이로드는 여자라고 해서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거기 멈춰라. 누가 보냈나?]
[겁이 많구나. 게이로드.]
여자가 말했다. 게이로드는 천천히 다가가 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여자가 말했다.
[겁내지 않아도 된다. 널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니까. 난 너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하러 왔느니라.]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게이로드가 여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분께선 어린 너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신 분이시다. 그 오두막에서.]
오두막이란 단어에 게이로드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어린 시절 오두막이라면, 분명히 자신을 돌보아 준 오두막 부부일 것이다. 게이로드는 그들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자신의 아들 아그나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그들이 보낸 여자란 말인가? 게이로드는 오두막 부부를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겼지만,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어디서 들은 것이냐? 그들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난 그저 그분의 말씀만 전하면 된다.]
게이로드와 달리 여자는 어떤 긴장도 하지 않았다. 게이로드는 '어쩌면 이 여자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생각이 들었다.여자가 다시 말했다.
[듣거라, 게이로드. 그분께서 너에게 경고하셨느니라. 너에게 마법을 걸러 오는 마법사를 경계하거라. 그가 너의 왕궁으로 찾아와 너를 해할 것이다.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짖거나, 물거나, 또한 덤벼들지 않는 자가 찾아온다면, 그 자가 바로 그 마법사이니라.]
[.....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여자의 말을 다 들은 게이로드가 물었다.
[네가 믿고 말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난 그분의 말씀을 전할 뿐. 그것을 따를지 말지는 네 몫이다.]
[.. 마법사라...]
게이로드는 여자가 한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때 자신의 눈앞에 있던 여자가 마치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놀란 게이로드가 황급히 불을 밝히고 방안과 창 밖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게이로드는 고민에 빠졌다. 어린 시절 오두막에서 만난 부부, 그들은 진짜 자신을 지켜주는 신들인 것인가? 그들이 다시금 자신을 구해주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간계일 것인가? 게이로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두건을 쓴 여인. 그녀는 아군인가? 소니카 아가왈 사진(출처 : https://unsplash.com/ko/@sonika_agarwal )
다음날, 게이로드의 왕궁 입구 옆에 아주 사나운 개 한 마리가 묶였다. 게이로드의 사냥개 중에서 가장 사납고, 무서운 녀석이었다. 이 사냥개는 오직 게이로드와 그의 아들 아그나르에게만 꼬리를 흔들며 얌전하게 굴었다. 그 밖에는 신하건, 손님이건 왕궁을 드나드는 모든 이를 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고, 무섭게 짖었다. 게이로드는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도 엄명을 내렸다.
[왕궁을 드나드는 모든 자를 조사하라. 특히 그중에서 수상함에도, 이 개가 짖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체포하라! 그가 불응하면 완력을 쓰거나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상관없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지만, 누구의 명령이라고 이를 어길 것인가. 병사들도 신하들도 모두 게이로드의 명령에 복종했다. 게이로드는 낯선 여인이 전한 오두막 부부의 경고를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 자신을 먹이고, 입혔으며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주었다. 게이로드는 그런 그들이 지금 와서 자신을 해칠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게이로드를 지켜주는 수호신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