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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드 단테 Apr 05. 2023

14.소녀에게 차인 오딘-둘 : 원숭이도 나무에서..

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 이야기, 오딘, 구애, 빌링의 딸

#. 원숭이도 나무에서..


 오딘은 당당하게 걸어가 안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빌링의 딸이 자고 있을 침실로 향했다. 그동안 오딘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안채 자체가 텅 빈 느낌이었다. 침실에 도착해서야 오딘은 한 거인을 만났다. 침실 문 옆에서 유모일듯한 늙은 여자거인이 의자에 앉아 자고 있었다. 오딘은 가만히 늙은 여자거인을 내려보았다. 오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귀가 먹기라도 한 것인지, 밖에서 그 오랜 시간 싸움이 벌어진 것도 모르는지, 코까지 골면서 세상모르게 잠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오딘이 빌링의 딸과 거사를 치러도 전혀 모를 것 같았다. 오딘은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실은 고요했고, 왠지 향긋한 향이 느껴졌다. 빌리의 딸에게서 느낀 그 향이었다. 창으로 아직 남아있는 달빛이 들어왔다. 오딘은 빌링의 딸도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침대로 향했다. 오딘은 손으로 침대의 차양을 걷었다.


[에?]


 오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빌링의 딸이 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침대 위에는 빌링의 딸 대신 웬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오딘은 황당했다. 밤에 찾아오라고 해서 난투까지 벌이며 왔는데, 빌링의 딸은 보이지 않고, 개 한 마리만 보이다니.. 어딘은 혹시 빌링의 딸이 마법이라도 걸린 것인가 싶어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마법도 느껴지지 않았다. 개는 암캐였고, 목줄은 침대 기둥에 걸려있었다. 오딘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딘은 이내 이 이상한 상황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오딘, 당신 같은 호색한에게는 여기 발정 난 암캐가 어울린답니다.]


 마치 빌링의 딸이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천하의 오딘이 빌링의 딸에게 제대로 차인 것이다. 아니, 그녀는 오딘을 함정에 빠뜨렸고, 오딘을 대놓고 조롱했다. 오딘은 분했다. 뭐라고 되받아쳐주고 싶었으나 빌링의 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침대 위에서는 발정 난 암캐 한 마리가 멍청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문밖에서는 귀머거리에 늙은 여자거인이 세상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뿐.


- 빌링의 딸과 오딘, 로렌츠 프로리히 그림(189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illingr )

- 그림설명 추가 : 그림엔 빌링의 딸이 나오지만, 신화에서는 빌링의 딸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거인이나 다른 곳에 분을 풀 수도 없었다. 이는 한강에서 빰맞고, 종로에서 눈을 흘기는 격인 데다가.. 자칫 이번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천하의 오딘이 요툰헤임의 어린 소녀에게 차인 것이 분해서 다른 거인들에게 그 화를 풀었다? 오딘에게 그것은 지금 당한 것 보다도 몇백 배, 몇천 배 더 큰 수모를 당하는 일이다. 결국 오딘은 속으로 분을 삭이며 빌링의 저택을 떠났다. 그나마 수많은 거인들은 두들겨 팼고, 그들 중 상당수를 니블헤임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채. 


 다행히 소문이 나지는 않았지만, 오딘은 자존심에는 큰 상처가 났다. 그래서인지, 오딘은 한동안 주변에서 여자에 대해 물어오면, 독기 서린 말을 들려주곤 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여자의 약속 또한 신뢰해서는 안된다. 

여자의 마음이란 질주하는 바퀴와 같은 것이니, 언제 바뀔지 알 수 없느니라.]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위험하단다. 여자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변화무쌍하지. 

그건 아직 발에 편자도 박지 않은, 반항적이고 거친 망아지를 얼음 위로 던져진 것과 같단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키도 없는 배를 타고 폭풍 속을 항해하는 것과 같지. 

힘없는 다리를 끌고 미끄러운 대지 위를 달려 순록을 사냥하려는 것과 같단다. 

여자의 사랑이란 건 그런 거란다. 거짓으로 가득하지.]


[내가 남자와 여자의 속성을 잘 아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건 확신할 수 있어. 

남자는 여자를 속이지. 우리 남자들의 약속이 확실해진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뜻이야. 

우린 여자들이 가진 상식을 파고든다고. 

우리가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선물 공세를 하고,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건 말이지. 

순전히 궤변이라고!]


[우리 남자들은 알아야 해! 아름다운 여자일수록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걸! 

우리의 구애에 대해 그녀는 비열한 모욕만 퍼부을 테니!]


[난 여자의 사악한 말에 죽을 정도로 상처 입은 자를 보았어. 

그녀의 거짓된 혀가 그를 부당하게 죽여버렸다고.]


라고 말하곤 했는데, 후에 이 말들이 여자에 대한 속담이 되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자존심을 회복한 뒤에야 오딘은 다시금 빌링의 딸이 갈대숲에서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이 그녀의 말을 잘 못 받아들인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한 말의 뜻은 '최고신이라 불리는 오딘이 사리분별도 못하고, 어린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뜻이었음을. 그것을 오딘은 지레짐작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딘은 그때의 자신이 적어도 연애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아닌 자만심 덩어리였음을 알았다.  세상 모든 여자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착각. 내가 원하는 여자는 그게 누구 건 다 내 것이라는 자만.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미숙했는지를 반성했다. 물론 그렇다고 오딘이 연애사업을 멈춘 것은 아니다. 대신 이전보다는 더 진지해졌고, 아무 여자나 유혹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자에 대한 조언도 달라졌다.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면 바르게 이야기하거라.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충분히 필요하단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거라. 그렇게 구애를 한다면 그녀를 얻을 것이다.]


[네가 좋은 여자와 즐겁게 대화를 하고 싶다면, 언제나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한단다. 그래야 그녀가 너에게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을 테니까.]


[다른 이의 아내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말거라.]


 오딘은 그때까지의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참 많은 여자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중에는 브라기를 낳아 준 '군로드(Gunnloð : 싸움거품)'도 있었다. 오딘이 마법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여자. 오딘은 '수퉁(Suttungr : 병들게 하는 혀)'에게서 시예의 봉밀주를 빼앗기 위해 그녀를 이용만 하다 버린 셈이 되었다. 시예의 봉밀주를 빼앗은 뒤, 솔직히 오딘은 한동안 그녀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브라기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서야 그녀를 떠올렸다.


 오딘이 그녀와 지낸 것은 고작 사흘. 사흘뿐이었다. 오딘이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뒤, 그녀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오딘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인 수퉁에게 모진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다른 거인들에게서도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딘과 함께한 그 사흘을 추억하며,  '브라기(Bragi : 시)'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잘 성장시켜 오딘에게 보냈다. 하나뿐인 아들을 오딘에게 보내며,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고, 또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오딘은 군로드에게 미안한 만큼 브라기를 더욱 아끼게 되었다. 오딘은 기꺼이 브라기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브라기에게 시의 재능이 있을 알고는 그 재능이 꽃피게 해 주었고, 자신의 상징이었던 '시의 신'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었다. 오딘이 자신의 상징을 다른 아들이나 신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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