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스루드는요~
하늘 위로 달이 떠오르고, 알비스는 언제나처럼 그 짧고도 거만한 걸음걸이로 비프로스트를 건넜다. 알비스는 밝은 대낮에는 스바르트알바헤임의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난쟁이라 주로 저녁이나 밤에 돌아다녔다. 밝은 태양빛은 난쟁이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들의 육체를 돌로 변화시켰다. 알비스는 아스가르드의 성문 앞에 서서 당당히 소리쳤다. 놋그릇이 깨지는 듯한 목소리가 성문을 두드렸다.
[어이~! 이봐, 거기 꺽다리 수문장 선생~ 알비스 님이 납시었다네~ 얼른 문을 열라고~! 예쁜 여신들이 이 몸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알비스가 부른 '꺽다리 수문장'이란 '헤임달(Heimdalr : 빛나는 집)'을 말하는 것이었다. 헤임달은 한 숨을 내쉬더니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병사들도 불쾌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없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알비스의 거만한 행동은 당연히 헤임달의 심기를 거슬렀지만 보잘것없는 난쟁이와 실랑이를 벌일 만큼 헤임달은 속이 좁지도, 한가하지도 않았다. 알비스는 마치 자신이 아스가르드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느린 걸음으로 성문을 지나갔다.
알비스는 여신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비스는 여신들 앞에서도 한껏 거들먹거렸다. 느릿느릿 자루를 열어 주문받은 장신구를 꺼내어 바닥에 펼쳤다. 여신들은 알비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신들의 관심사는 자신이 주문한 장신구였지, 알비스 같은 더러운 난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 장신구를 받아 든 여신들 가운데 천둥신 '토르(Thor : 천둥, 굉음)'의 아내인 '시프(Sif : 인척)'와 그녀의 딸, '스루드(Þruðr : 힘)'도 있었다. 시프는 딸을 위해 알비스에게 새로운 머리장식을 주문했다. 스루드는 어머니인 시프의 아름다운 외모와 눈처럼 하얀 피부를, 아버지인 토르의 강함과 자상함을 동시에 물려받은 명실공히 세상이 알아주는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하면, 미의 여신 '프레이야'와 오딘의 아내 '프리그', 그리고 스루드의 어머니인 '시프'를 말한다. 아직 스루드는 이 세 여신과 같은 반열에는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사랑과 인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수많은 젊은 신들과 젊은이들에게 가장 최고의 관심을 받는 젊은 여신, 그녀가 바로 스루드였다. (비유를 해보면.. 아스가르드의 아이돌 스타? ^^;) 알비스는 스루드를 처음 본 순간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니.. )]
알비스는 스루드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장신구 값을 어떻게 받았는지, 새로운 주문은 어떤 것인지.. 하는 둥, 마는 둥 알비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작업장에 돌아왔다. 알비스는 자루와 주문서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그대로 지저분한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알비스는 한참 동안 시커먼 작업장의 천장을 보았다. 알비스의 머릿속에서는 시커먼 작업장의 천장이 아닌,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그 광경은 스루드로 가득했다. 아까 본모습을 넘어 이제는 알비스가 원하는 대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알비스는 스루드와 함께 사랑을 속삭였다. 순전히 알비스의 상상일 뿐이지만, 그게 무엇이건 알비스는 그저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을 넘어 알비스의 자만심과 거만함, 허영심과 한데 뒤섞이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저 정도는 되어야 여자지! 그래야 이 위대한 알비스 님의 아내가 될 수 있지~! 암!]
알비스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부터 알비스는 스루드가 자신의 아내라도 된 듯 말끝마다 '우리 스루드, 우리 스루드'라고 지껄이며 다녔다. 알비스가 흔히 '말하면 이루어진다.'라거나, '확언의 힘' 같은 것을 믿은 것은 아니다. 알비스는 자신이 결정했다면, 세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뜻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음에도 알비스의 끝간데를 모르는 자만심과 거만함은 정말 갈 데까지 가버리고 만 것이다.
- 발키리들. 힐드, 스루드, 흐로키. 로렌츠 프로리히 그림(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C3%9Er%C3%BA%C3%B0r ) - 그림설명 추가 : 스루드는 한편으로는 발키리의 일원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알비스에게 자신은 더 이상 구더기에서 태어난 난쟁이가 아니다. 자신은 이 세상의 정점에 있는 지고한 자다. 온 세상은 알비스의 발아래에 있다. 신도, 거인도, 인간도.. 아니 운명조차도 알비스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로 보았다. 스루드 정도의 여신은 자신이 청혼한다면, 그 은혜를 기뻐해야 한다. 토르와 시프도 자신을 사위로 맞게 된다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한다. 오딘과 신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혼례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첫날밤, 스루드는 수줍은 미소와 달리 온갖 교태를 부리며 알비스의 품으로 파고들 테지. 이 모든 것은 알비스의 허황된 망상이자 근거 없는 믿음이다. 세상에서 그것을 모르는 건 알비스뿐이다.
다른 난쟁이들은 드디어 알비스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젊은 난쟁이들은 알비스를 조롱했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 알비스의 거만함과 허영심을 비웃었다. 나이 많은 난쟁이들은 신들의 분노, 특히 토르의 분노를 사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알비스가 미쳤건 아니건, 토르의 딸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건 난쟁이들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닥치라구! 이 구더기들아! 내가 너희랑 똑같은 줄 알아?! 내가 너희처럼 썩은 시궁창에서 노는 놈들과 같은 줄 아냐구! 난 알비스야! 위대한 알비스! 아홉 세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최고, 알비스란 말이야! 오히려 스루드가 내 아내가 되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구!]
알비스는 난쟁이들의 비웃음과 걱정을 오히려 비웃었다. 작업장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알비스는 스루드를 아내로 만들어 다른 난쟁이들의 기를 죽여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비스는 더 생각하고 말고도 없이 그 길로 아스가르드로 향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스루드가 자신의 아내가 될 날과 다른 난쟁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난쟁이들의 비웃음은 알비스의 그 커다란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으니까.
알비스는 어두운 밤길을 달려 '반짝이는 길(비프로스트 : Bifrost)'에 도착했다. 알비스는 여느 때처럼 아스가르드 성문 앞에서 소리쳤다.
[어이~! 꺽다리 선생~ 나 알비스 님이라고! 어서 문을 여셔! 이 위대한 분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셔!]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인상을 잔뜩 구긴 병사가 나왔다. 그는 귀찮다는 듯 알비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알비스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거만하게 성문을 지나갔다. 알비스는 곧장 토르의 저택으로 향했다. 몇 번 아스가르드를 드나들면서 토르의 저택이 어디 즈음에 있는지 대충 들은 것이 있었다. 알비스는 그 짧은 다리로 '스루드헤임(Þruðheimr : 힘의 평야)'의 들판을 열심히 달렸다. 알비스가 토르의 저택에 도착한 것은 달이 이미 하늘의 한가운데를 지난 뒤였다. 물론 알비스는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빠르게 달린 것이지만.
[이봐~! 알비스 님이 오셨다! 내 신부를 보고 싶어! 여기 알비스 님께서 행차하셨다! 어서 문을 열어!]
알비스는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닫혀진 저택의 문을 향해 소리쳤다. 한밤중에 난쟁이가 그것도 아스가
르드 최고의 용사 토르의 집 앞에서 거만하게 소리친다는 것은 정말 죽으려고 발악을 하거나 돌아버리지
않은 이상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럼에도 알비스는 오히려 더욱 거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내 신부, 스루드의 서방님이 오셨다니까! 뭐 하는 거야! 어서 문을 열란 말이야!!]
알비스는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왜냐하면, 마침 토르가 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비스의 불행의 전주곡은 스루드를 탐내면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토르가 집에 있었다란 사실은 진정한 불행을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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