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늦도록 토르는 잠이 들지 못했다. 낮부터 한잠 늘어지게 잔 뒤여서인지, 도무지 잠이 올 기미도 안보였다. 침대에서 홀로 이리저리 뒤척이던 토르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토르는 입이 말랐고, '미드(Mead : 벌꿀술)'가 고팠다. 그러나 토르는 왠지 망설이다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아내인 '시프(Sif : 인척)'가 '스루드(Þruðr : 힘)'를 데리고 '난나(Nanna : 대담한)'의 결혼 수업을 도와주러 가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기는 해요? 이러다가는 땀 대신 미드가 흘러나올 것 같다구요! 몸에서 술냄새가 빠지기 전까지는 나랑 같이 잘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토르는 당황했다. 대체 무슨 술냄새가 난다는 말인가? 자신은 그저 술을 '반주(飯酒 : 식사를 하며 즐기는 한두 잔의 술)'정도로만 즐길 뿐인 것을. 가볍게(?) 한 잔 걸치고, 시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숨소리와 냄새를 맡으면서 자는 것이 토르의 행복이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라니.. 그러나 이번에는 시프도 단호했다. 사실 시프로서도 이럴만했다.
토르는 술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넘어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솔직히 '천둥의 신'이 아니라 '술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술(斗酒)', '애주가(愛酒家)', '주당(酒黨)'이라는 말로는 토르의 술사랑을 설명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술에 있어서 만큼은 토르와 맞붙어서 이긴 존재도 없다. 물론, 토르는 어디까지나 자신은 그저 평범하게 술을 즐기는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여행도 가지 않고, 여러 신들과 어울려 술모임을 가진 터라 시프의 참을성도 폭발하고 말았다. 시프의 말에 토라진 토르가 곁에 선 스루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스루드도 시프와 다르지 않았다.
[아빠, 나도 엄마 말에 찬성이에요! 아빠가 저에게 뽀뽀하려고 할 때마다 얼마나 술냄새가 나는지 아세요? 끊으시라고는 안 할 테니, 좀 줄이세요! 네?!]
[흥이다! 흥! 아주 모녀지간에 날 달달 볶네! 볶아~! 흥!]
딸까지 아내 편을 들고 나서니 토르는 제대로 토라져버렸다. 시프와 스루드는 토라진 토르를 모른척하고 그대로 난나의 결혼 수업을 돕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마도 앞으로 사나흘은 지나야 돌아올터였다. 토르는 여전히 토라진 채, 배웅도 하지 않았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토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그냥 여자들끼리 똘똘 뭉쳐서는.. 흥이다!.. 나두 아들내미 하나라도 있었으면 내 편을 들어줄 텐데.. 하아..]
하지만 혼자 남게 되자 토르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동안 자신이 너무 많이 마신 것도 사실이었고, 아내와 딸이 잔소리를 할 만했다. 토르는 아내와 딸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토르는 뒷목을 긁적거렸다.
[.. 조금만 참아볼까? 흠.. 마누라랑 딸내미가 돌아올 때.. 까지만? 흠..]
- 마블 시리즈에 등장하는 토르가 이런 모습인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출처 : https://superheroeseatingfood.com)
토르는 일단 시프와 스루드가 돌아올 때까지 금주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본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다.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쁘게 움직였다. 묠니르와 장갑, 허리띠도 깨끗하게 손질했다. 평소라면 하인들에게 맡겼을 테지만, 오늘은 토르가 직접 깨끗이 닦았다. 잘 손질된 무기와 마차를 보니 토르는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것과 술생각은 전혀 다른 장르지만. 그렇게 바쁘게 움직였음에도 겨우 점심을 지날 무렵이었고, 토르는 슬슬 술생각이 났다. 토르는 물로 대신하며 버티다가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에라~ 잠이나 자자. 자면 술생각도 덜나겠지.]
그렇게 늘어지게 자고 나니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밤이 되니 토르는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술생각은 더 간절해졌다. 토르는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낮에 많이 자서 그런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토르는 결국 침실을 벗어나 정원으로 나왔다. 이미 하인들도 잠이 들어 저택은 고요했다. 토르는 정원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보았다. 별이라도 세다 보면 잠이 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밤바람이 시원해서인지 오히려 머리가 더 맑아졌다. 잠도 안 오고 심심해진 토르는 눈으로 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꾸만 그 모양이 술병이나 술잔 모양으로만 이어졌다.
[하아.. 그냥.. 딱 한 모금만 할까? 수면제용으로? 흠..]
토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모두가 깊이 잠이 들었다. 토르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토르답지 않게 발뒤꿈치까지 들고 살금살금 술창고로 향했다. 바로 그때, 저택 대문 밖에서 뭔가 놋그릇이 깨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분간하기도 힘든 이상한 소리에 토르는 깜짝 놀랐다. 저 소리에 하인들이 깨기라도 하면, 술 한 모금은 물 건너갈 것이다. 토르는 인상을 구기며 대문으로 향했다. 술 한 모금이라도 하려면, 저 이상한 소리를 빨리 멈춰야 했다. 토르가 대문으로 향하는 내내 이 이상한 놋그릇 깨지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가만히 들어보니, 스루드가 어쩌고, 신랑이 어쩌고 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토르가 가만히 대문을 열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내 집 앞에서 떠드는 거야!?]
[나다.]
황당한 대답에 토르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겨우 자신의 발 앞에 웬 난쟁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나 볼품이 없던지, 키는 토르의 무릎에도 닿지 않았다. 달빛이 아니면 들판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 뭉치가 부딪힌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토르는 황당했다.